러시아공사관과 고종
구러시아공사관 2015년에 방문 기록
구러시아공사관 조선말 근대 건축 양식들이 몰려있는 공간이고 당시 격변의 역사가 요동치던 공간입니다. 아주 잘만든 드라마인 미스터선샤인의 주요 건물들이 나오는 공간.
조선왕조 오백년 말기 그동안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제외한다면 사회가 급속도로 변한 것은 조선말기 대한제국 시절로 초기라 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은 외부의 침략에 이백여년 가까이 전쟁이 없었기에 무사안일했던 측면과 실질적인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명분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측면이 있었습니다.
구한말은 산업혁명이후 급속도로 팽창한 서구의 근대화를 쫓아가는 시기를 놓쳤기에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열강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 거기에다 안동김씨등 외척의 발호가 있었습니다.
정조사후 부패의 정도가 심해져 국가의 질적인 면이 서서히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었기에 급기야 외세의 입김에 바람처럼 몰려다니던 시절
이곳은 한국 가톨릭 수도원 첫자리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우리가 알고있는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1895년 을미사변으로 무참하게 명성황후가 죽었고 이후 불안을 느낀 고종
친러파 이범진(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위종의 아버지)과 베베르가 협의를 해두었고 일본의 경계를 엄상궁이 평소 낯을 익히고 뇌물로 친밀하게 해두어 가마를 타고 궁궐을 빠져나가 그대로 러시아공사관으로 직행한 것입니다.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모습 경운궁과 비밀통로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박색으로 유명했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영친왕을 낳은 엄상궁은 나중에 순헌황귀비가되며 황후의 자리까지 오르게됩니다.
구러시아공사관의 현재
정동길에 위치한 구 러시아 공사관 건물 625 한국전쟁때 대부분 무너지고 현재는 망루만 남은 상태

구러시아공사관의 원래 도면 현재는 푸른색으로 표시된 탑만 남음

러시아 공사관은 을미사변 당시 현장 목격자이기도한 사바틴이 설계한 건물 1885년 착공되어 1890년 완공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이후 공사관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지만 1949년까지 실제로 사용했지만 한국전쟁중에 크게 훼손되었고 그후 복원되어 남은 것은 현재의 망루
고종은 아관파천후 독살을 염려해 통조림만 먹었다고 전해짐.
유길준과 고종의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 계기가된 을미사변

을미사변은 서유견문의 저자인 유길준이 연루되었다는 설이있고 윤치호는 그날 만난 유길준에게서 이런 모습을 감지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유길준은 명성황후와 적대관계였던 흥선대원군과 선이 닿은 상태였고 이를 실행에 옮겼는데 후일 편지에서는 일본에 손을 빌린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는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하기도..
아관파천이후 고종은 김홍집 내각을 해체하고 유길준은 체포하라고 명령..
결국 김홍집 어윤중등 당시 내각은 반일 감정이 극도에 달했던 대중들에게 죽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도망..
하지만 이후 행보를 보면 유길준은 을사늑약과 일본의 한일합병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고종을 밀어내고 대한제국 황실에서 반일을 내세운 의친왕 이강을 추대하려고도 기도했지만 실패
아관파천 이후 아라사로 불렀던 러시아는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이를 좌시하지 않던 일본이 선전포고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
예상과 다르게 일본이 승리하면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미국과 맺어 서로의 권한을 챙기고 고종을 협박하고 먹히지 않자 이완용등 대신들을 이용해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권한을 못박게됨..
을미사변과 일본의 낭인들
일본 부랑자 에서 시작한 낭인들은 전국시대 패전으로 주군이 사라졌거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같이 격하된 무소속이 되버린 무사들이었습니다.
정식 군인에 편입되지 않은 그때그때 일을 따라다니는 무력집단이랄 수 있습니다.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낭인들 한성신보사앞

일본은 전국시대이후 넘처나는 이들 낭인계층이 사회적으로 문제였는데 일정한 직업을 가지기 힘든 계층으로 궁핍하지만 무력을 갖추었기에 용병으로 쓰일수도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엄청난 축재를 하고 있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본명이 차차인 요도기미로 불리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히데요리는 거의 엄마 치마폭에 덮여사는데 이들을 비호하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세키가하라 패전이후 처형된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사카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를 때 이들 낭인부대를 동원합니다.
을미사변에 동원된 낭인은 요즘으로 치면 표면적인 애국심등으로 위장한 정치깡패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이들을 동원한건 일본측의 교묘한 계산이 깔린 것으로 은폐나 나중에 책임회피를 하기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고종의 아관파천이후 힘없이 외세에 기대하는 것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역사
우리로서는 외세에 기대는 개혁이나 권력의 유지가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준 근대사의 단면으로 갑신정변이나 청나라에 손을 내밀다 청일전쟁후 러시아로 선회하던 명성황후의 최후
그리고 한때 외세에 반대하며 쇄국정책까지 고집했었지만 며느리와 권력다툼을하던 흥선대원군의 일본에 이용당하게된 일시적이던 우호적 자세는 결국 외세를 등에 업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란걸 보여주었습니다.
설혹 성공하더라도 커다란 댓가를 치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후 1897년 여론에 못이겨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지만 이미 우리나라의 권리는 열강들에 의해 조각조각난 상태..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채굴권 경원과 종성의 광산 채굴권 경원전신선등 여러가지 경제적 이권을 챙겨갔고 다른 나라들도 동등한 조건을 요구하면서 철도부설권등 여러가지 권리를 헐값에 내어준 역사.




최근에 덕수궁 주변 정동에 가면 역사적인 복원도 많았습니다.
거리도 많이 리모델링되어 카페가 많아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 자료가 정리되면 새롭게 다시 작성해야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