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김홍도의 어린 시절 살던 곳이 안산 성포리 노적봉 인근 바닷가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바닷가가 아닌 아파트로 둘러 쌓인 동네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서호라 불리는 바닷가였습니다.
단원미술관에서 김홍도미술관으로 이름을 변경해 조금은 어색했지만 적응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입에 붙어서인지 단원미술관으로 아직도 부르게됩니다.
김홍도미술관 3관에서는 김홍도가 어린시절 이곳에서 살았던 기록들과 당시 이곳의 풍경들을 재구성해보는 전시입니다. 2022년에 시작된 전시로 현재는 다른 전시중입니다.
조선시대 안산지도
성포리 노적봉 인근에 살던 김홍도와 수리산 수암봉아래 살던 강세황 바로 옆 부곡동에는 진주 유씨들이 살았는데 청문당 경성당 두개의 만권당이 있습니다. 부곡동과 노적봉옆 첨성리에는 성호이익 선생의 성호장이 있었습니다. 18세기 영정조의 치세기간 안산의 학문과 예술이 꽃피던 시기의 지도
김홍도의 그림 스승은 표암 강세황과 도화서 화원이 되기 이전 강세황과 친하게 교류하던 현재 심사정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단원 전기를 쓴 이충렬 작가는 심사정의 제자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안산에는 출사길이 막힌 남인 계열의 성호 이익 선생이 현재의 안산 일동인 첨성리에 낙향해 평생 학문에 힘쓰고 있었고 여주이씨 가문과 정정옹주와 결혼한 진안위 유적의 진주 유씨 가문을 들 수 있습니다. 사패지로 왕이 내려준 땅인 이곳에 정착하게된 가문인 진주 유씨집안은 기호남인 계열로 영조대에 이인좌의난에 연류되면서 출사길이 막혀있었습니다.
김홍도가 30세 이전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공원춘효도
조선후기로 들어선 시점 과거시험장의 모습입니다. 부정시험이 만연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한명의 응시생과 거기에 딸린 자리잡는 사람 글씨써주는 사람 문장만들어주는 사람등이 단체로 모여 과거를 치르는 장면입니다. 성호선생은 이런 분위기의 과거시험장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다시는 과거를 보지않고 평생 공부에만 매진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영조 정조시절까지 안산에는 강력하게 뿌리내린 토착세력화된 가문보다는 서울에 본격적으로 입성하지 못하거나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집안들이 내려와있어 세속적이고 출세지향적인 것보다 당시에 소외된 선비들이 하던 학문에 정진하거나 예술에 빠져 지내던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안산지역은 아니지만 서예 대가이자 거문고 명인이던 성호 이익의 형 옥동 이서나 그와 절친했던 공제 윤두서와 같이 출사길이 막혀 낙향하거나 조용히 은거하면서 학문과 예술에 기대어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세에 부인인 진주 유씨를 따라 처남인 유경종의 권유로 안산에 내려와 살던 강세황과 선대에 역모에 연류된 집안이던 심사정도 당시 선비들의 목표였던 출사길이 막힌 집안이었는데 이곳에서 강세황과 교류하며 예술에 심취해있던 인물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미술평론가이기도했던 강세황은 귀를 베어버린 고호처럼 자기 눈을 찌른 기인이었던 최북같은 예술가들과 깊이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들이 모여 아회를 하던 균와아집도가 있습니다.
단원은 사대부들의 풍류와 예술적 분위기속에서 안산에서 성인이 될때까지 이들과 교류하며 지냈습니다.
미술관에 상영중인 균와아집도를 보정해 애니로 만든 작품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 그림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퉁소를 부는 김홍도 거문고를 타고 있는 강세황 바로 옆 어린아이는 김덕형으로 훗날 꽃그림으로 유명해졌고 옆에는 현재 심사정이 앉아있고 바둑을 두는 최북과 구경하며 훈수두는듯한 허필과 담뱃대를 물고있는 맞상대는 추계(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음)이고 뒷모습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이는 균와로 단원보다 한살 어린 신광익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림이 그려진때는 1763년으로 19살의 풋풋한 김홍도와 고상한 50대 아저씨들의 모임인데 대나무 움집을 뜻하는 균와는 안산인지 다른장소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구도는 강세황이 잡고 인물은 김홍도가 소나무와 바위는 심사정이 그리고 색을 입힌건 최북으로 허필이 발문에 밝혀두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 예인들의 합작품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수있겠습니다.
연객 허필의 발문
倚几彈琴者豹菴也傍坐之兒金德亨也含
烟袋而側坐者玄齋也緇巾而對棋局者毫生也
對毫生而圍棋者秋溪也偶坐而觀棋者烟客凭几
而欹坐者筠窩對筠窩而吹簫者金弘道畫人物者
亦弘道而畫松石者卽玄齋也豹菴布置之毫生渲
染之所會之所乃筠窩也
癸未四月旬日 烟客錄
단원아집(檀園雅集)과 섬사편(剡社篇)
단원아집은 현재의 노적봉 부근에 있던 박달나무숲에서 성호이익 선생의 여주이씨 선비들과 강세황이 같이 즐긴 아회를 기록한 것입니다. 1753년 7월 여름에 있던일인데 성호이익이 서호로 칭했던 안산 바닷가에서 모인것으로 참가자는 이재덕(李載德) 강세황(姜世晃) 이현환(李玄煥) 권매(權勱) 이용징(李龍徵) 이광환(李匡煥) 이창환(李昌煥) 이경환(李景煥) 이재억(李載億) 이재의(李載誼)등이 모여 시를짓고 방점을 찍으며 아회라는 말그대로 우아한 풍류를 즐기던 것입니다.
모임을 주관한건 이재덕으로 성호선생의 손자뻘되는 사람인데 서울에서 살다 안산으로 이주한 후 자주 이런 시회를 열었으며 처음에는 성촌 조귀리(조구나리?)에 있다 이사하여 살던곳은 성고(聲皐: 聲浦의 언덕 이라는 뜻) 지금의 성포동입니다. 이런 모임을 자주열었는데 인근에 살던 진주유씨 후손들과 강세황 그리고 그와 교류한 예술가들을 들 수 있겠습니다.
표지에 성고라 쓰여진 방인이 있는데 이재덕이 쓰던 것으로 성고(聲皐 - 聲浦의 언덕)는 지금의 성포동과 일동을 지칭.
당시의 장면을 남긴 그림 섬사편(剡社篇)
단원아집과 섬사편에 대한 상세한 설명
김동준 이화여대교수 -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단원(檀園)의 풍경을 찾아서
동시대에 표암과 성호가 공존하던 지역의 이런 분위기속에서 자란 천재 김홍도는 단순한 그림 묘사 능력뿐만이 아니라 중인이란 신분에도 멋스런 선비들의 풍류와 아취를 자연스럽게 함양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단원의 위치는 아마도 가사미산인 현재의 노적봉 인근으로 추정되는데 김동준 교수가 단원으로 추정한 두곳은 첨성리 위쪽으로 성태산 수리산과 성호이익이 거주하던 성호장과 연결된 현재의 점성공원(동네에서는 점섬공원으로 불리기도합니다. 공원내 체육관의 정식 명칭도 점섬체육관)이나 두번째로는 노적봉 너머 성포동입니다.
지도는 제공되지 않습니다.
점섬(占剡)으로도 불리던 곳이 이곳이었고 1754년과 1755년 두번의 아회 가운데 섬사편(剡社篇)에 그림으로 이철환이 기록한 것으로 장소는 두곳을 번갈아가며 열렸을수도 있겠습니다. 단원의 정확한 위치는 지형이 많이 바뀌어 지금으로선 알수 없을듯...
점섬의 현재 모습 - 안산 일동 점성공원
노적봉에 위치한 김홍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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