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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놀이터/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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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아관파천 당시 고종의길과 러시아 공사관 복원 - 덕수궁 선원전 일원 명성황후 시해이후 일본등 외세의 위협에 고종은 민비에 의해 쫓겨났던 엄상궁(후일 순헌황귀비)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녀의 기지로 경복궁을 탈출했고 친러파인 이범진등의 도움으로 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아관파천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당시 이곳 경운궁은 러시아 공사관과 지하에 연결된 곳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경운궁(덕수궁의 옛이름)은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고 볼수있는 경희궁과 다리를 놓아 연결되어있었습니다. 즉 경운궁의 영역이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바로 밑에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아관파천이후 독살을 우려해 통조림만 먹던 고종은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나라에 이권만 계속 나눠주었고 이후 경운궁으로 옮겨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제자리를 찾고 싶어 했지만 이미 대세를 거스를수 없었던 상태... 이..
안중근과 이완용 그리고 이토히로부미 - 동양평화론 전문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총성.. 그리고 일본의 근대를 열었던 권력의 정점에 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던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났다. 그를 저격한건 30살을 갓넘긴 청년 안중근.. 그는 한맺힌 유년시절이 있던것도 아니고 비뚤어진 아웃사이더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사람이 아니었다. 지방관료지만 벼슬이 있는 양반집에 축적해둔 재산이 꽤되는 넉넉한 집안 첫째아들로 태어났고 요즘 말로하면 일명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고을 현감으로 미곡상을 운영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해놓았고 아버지는 비상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정식으로 과거급제까지 했던 인물. 청소년기 안중근의 집안은 동학난을 평정하는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물론 대대로 관직에 있던 집안의 의무이기도했지만..
[도서평] 미야모토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 이종각 명성황후 민씨의 죽음에 관해 지난번에 읽은 저서는 사바찐의 시선에서 재구성했던것인데이책은 본격적인 탐구서 가운데 하나 실제로 명성황후를 시해한건 낭인들일까? 일본 군인이었을까? 를 밝히는 책저자는 일본군 소위인 미야모토를 지목했는데..미우라는 결과지향적인 군인이었기에 낭인들에게 맡기는 변수로인한 불안함보다 확실한 처리를 원했던것 그렇게하기위해 군인을 최종 순간에 같이 투입시켰던것이 추론이 사실이라면 이문제는 낭인들에게 돌아갈 우발적으로 이뤄졌다는 해석을 지워주는 부분으로충분히 국제적으로 문제화시켜 사과와 배상을 받아야할 문제 블로그의 관련글2015/10/25 - [한국사 놀이터/근대] - [도서평] 명성황후 최후의 날 - 사바찐이 목격한 을미사변 그날 육군 장성 출신의 미우라 고로당시 청일전쟁에 승리하며..
[도서평] 명성황후 최후의 날 - 사바찐이 목격한 을미사변 그날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그녀는 1985년 10월 9일 황후로서 자신의 나라 자신의 처소에서 외국 자객들의 칼에 허망하게 죽임을 당하고 불태워져 사라졌습니다민비라고도 부르는 여인은 국가의 황후였고 대단한 권력자였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도 겨룰 정도의 야심과 지략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원래 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걱정해 8살때 양친을 여읜 민치록의 딸을 며느리도 받아들이지만 오히려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셈 어릴때부터 독서 특히 춘추와 춘추좌씨전같은 역사서를 즐겨 읽었다던 명성황후 민자영대원군과의 권력싸움에서 승리하고 조언자 역할을하며 고종과 매일밤 행사에다 관련인물들이나 무속인들에게 후하게 내주면서 국고를 많이 탕진하기도했기에 우리는 이시대를 말아먹은 사람들로 흥선대원군 고종 민비를..
근대사의 아픔과 현대사의 상처가 엮여진 공간 - 효창공원 효창원 효창공원은 어릴때부터 효창운동장으로 오히려더 귀에익은 공간으로 축구경기가 열리던 곳 하지만 이곳에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상징적 인물인 백범 김구는 물론이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묘는 물론이고 후일 돌아올 안중근 의사의 가묘까지 마련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들이 묻혀있는데다 김구와 같이 임시정부의 주요인물이던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의 묘가 있는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성역화 되었어야 할곳 어릴때 가봤던 창경원은 지금의 에버랜드와 비슷한 동물원의 이미지가 더 강했던곳이었습니다. 원래 유서깊은 조선의 궁궐이었지만 일제에의해 법궁인 경복궁에는 총독부 건물이 광해군이 중건한 경희궁은 자취조차 사라졌고 정문인 흥화문은 이토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창덕궁은 비원이라..
[도서평 안중근 평전]사상가로서도 존경스러운 안중근의 초상 - 황재문 앞서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에 이어 안중근 의사의 평전을 읽었습니다. 이완용을 근대적 합리성을 갖춘 엄친아로 유교경전은 물론이고 조예가 깊었던 서예에다 구한말 영어까지 구사했던 인물이지만 기득권과 왕권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결국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부자소리 들으며 먹고 살만한 집안의 귀한 맏아들로 좌충우돌 무인기질이 강했던 안중근은 정반대의 길을 가게됩니다. 두인물 모두 이토 히로부미와 관련이 깊었는데 이토 사망이후 안중근은 재판에 넘겨지고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의 조문을 가게되는 두사람의 엇갈린 길 특히 지금과 같이 동북아를 둘러싼 외교관계가 커다란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시기이기에 더더욱 두인물을 비교해서 보는것은 나름대로 많은 의미의 진폭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완용은 이재명의사의 암살시도가..
[도서평 이완용 평전] 김윤희 저 - 평전에서 빠져버린 저작자의 생각 이완용하면 을사5적이자 매국노로 이름을 떠올리는것조차 불쾌해하는 인물입니다 일제식민지시대를 그나마 합리화하려는 뉴라이트 진영에서조차 크게 거론치 않는 인물로 이런 사람의 평전을 쓴다는것은 저자도 서두에 밝혔듯이 매우 어려운일 하지만 한가지 궁금했던것 과연 이사람은 무슨생각에서 저런 매국노짓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에 읽게된책 이완용은 1858년 7월 지금의 분당인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에서 출생 집안이 너무 가난했지만 그의 선조대는 문관과 무관을 모두 배출한 집안이었는데 8대조 할아버지 이후 벼슬한적이 없는 몰락한 가문 하지만 이완용은 어릴때부터 매우 영민해 글을 빨리 깨우쳤는데 가난한집안에 위에 형까지 있었기에 큰 무리없이 먼친척인 중추부 판사 이호준에게 입양되었는데 이호준도 이집안에 양자로 들어온터였고 아..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망국을 길을 가게되는 대한제국 1905년 7월 29일 가쓰라 태프트 밀약 한마디로 정리하면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영향권을 가지고 당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하며 기고만장하던 일본은 조선에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밀약.. 즉 공식화된 선언은 아니었지만 1924년 미국의 타일러 데넷에 의해 밝혀지면서 나온것으로 이로인해 일본은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을 병탄하고 이후 미국으로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할수 있고 경제적인 이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것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독특한 문명관을 가졌는데 다위니즘 신봉자로 국제간에도 우열론적 시각으로 약한 국가는 강한 국가의 통제하에 놓이는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전해지는데 눈썰미가 있고 영화를 보신분이라면 박물관이 살아있다에 나온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했던 그인물.. 미국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