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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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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일동 이익선생묘 첨성사 - 성호 이익 유적지 답사 안산 일동에오면 대로변인 성호공원에 식물원(행정구역상 이동이지만 접근성은 일동이 더 가깝습니다)이 있고 바로옆에는 주차장과 성호박물관이 있습니다. 성호 이익 선생이 어린시절 내려온후 평생을 머무르며 학문에 정진하던 곳으로 박물관 맞은편에는 성호이익 선생의 묘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익선생묘는 가문인 여주이씨의 묘역으로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계손이 선산으로 자리를 잡았고 후손들이 자연스럽게 거주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습니다. 이익선생묘는 안산개발을하던 70년대에 이장 논의가 있었는데 다른 묘소는 이장을 했지만 이익선생묘는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이익선생묘는 직계후손이 없어 방치되다 1967년 이익선생추모회에 의해서 정비되었습니다. 2014년 이익선생묘 영상 블로그 관련글 - https://nolete..
18세기 새로운 흐름 실학의 성호 이익 선생이 살던 성호장의 위치는? 성호 이익선생의 호가 성호(星湖)인것은 별을 보던 호수가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별의 의미는 서정적인 의미도 담겨있지만 당시 서구의 과학이론들이 북경을 통해 이미 많이 들어와있었고 성호 이익은 부친 이하진이 북경 유리창을 통해 들여온 수천권의 장서를 섭렵한 상태였습니다.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성호 집안의 손자이자 제자이기도했던 이가환이 신유박해때 천주교 수용으로(그의 천주교 수용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옥사하면서 채제공을 이을 남인의 차기 정승이자 조선의 수학 천재가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가환은 정조가 극심한 당쟁속에서도 남다른 학식을 인정하고 여러번 보호해주던 천재였습니다. 안산 도시개발이 시작되면서 여주이씨 집안의 묘역이 대부분 이장되었지만 성호 이익 선생의 묘만 주변의 반대로 남게되었습..
성호 이익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첨성리 - 경기도 안산 일동 탐방 첨성(瞻星 - 별을 바라본다는 의미)으로도 불리고 점성으로도 불리던 현재의 안산시 일동은 수도권 변방의 조그만 동네입니다. 흔한 아파트 하나 들어서지 않은 동네로 요즘의 잣대로 본다면 개발호재가 있다거나하는 영양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성리학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며 정쟁에만 신경쓰던 사대부들이 변화하는 세계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며 18세기 조선시대 후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중요한 학자 한분이 평생 학문을 연구하던 동네입니다. 안산군읍지에 실린 안산지도 오른쪽 끝에 광주와의 경계지점에 보이는 점성마을이 이곳으로 당시만해도 현재 성호공원과 연결된 노적봉 옆으로는 바다였습니다. 1842년 지도 성호선생이 서호라 부르던 바닷가 조용한 어촌마을이던 이곳에 성호 이익 선생은 평생 은거하면서 연구한것은 현재의 실학이라..
진주유씨 집안의 부계전도 - 1900년 안산 부곡동 지도 - 성호박물관 성호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부계전도와 부계팔경도는 1900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안산 부곡동을 세거지로 삼았던 진주유씨 집안의 토지와 지명을 꼼꼼하게 기록한 지도이자 그림입니다. 현재의 청문당과 경성당과 주변을 감싸고있는 수리산자락의 옛지명과 모습을 기록해두었습니다. 진주유씨 집안의 모산 유원성(帽山 柳遠聲, 1851~1945)이 그린 작품입니다. 유원성의 자는 주명(周鳴), 호는 모산(帽山), 본관은 진주이다. 187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897년에는 법부주사로서 고종이 원구단에서 고유제를 지낼 때 재랑(齋郞)으로 참여하였다. 1899년 평리원주사를 거쳐 같은 해 겸임법규교정소주사를 지냈다. 1901년 산릉도감낭청과 평리원검사를 지냈고, 법부 법률기초위원과 법부교정소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06년..
겨울날 산책 - 팔곡리 향나무 카페 모더스 브레드(modus bread) 반월호수 지난 주말 산책길은 집근처 팔곡동에 있는 육백년된 향나무를 보러갔습니다. 집주위에 오래된 나무가 있는줄 몰랐는데 지난 가을 소래산부근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의 기억이 너무 좋아 찾아갔습니다. 집주위에는 조구나리에 있는 느티나무와 노적봉의 금강송이 떠오릅니다. 십년전즈음에는 안타깝게 금강송 옆에있는 음나무가 고사해 완전히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 나무들에 대해서는 따로 써야겠네요. 북극한파로 날씨가 급냉했지만 조금 풀렸기에 운동겸 나간 것으로 집주변 중앙병원(안산산재병원) 뒷길로 들어서 수리실 고개길을 넘어갔습니다. 아직 눈이 녹지않아 경사진 곳에서는 조심조심해서 걸어갔습니다. 지도를 찾아보고 처음에 이 코스로 산책하던 칠팔년전이 떠오릅니다. 비오는날 공동묘지앞을 지나는 길이라 갔이갔던 아내는 다시는 안온다..
단원의 일생을 저술한 붓으로 세상을 흔들다 천년의 화가 김홍도 - 이충렬 인물의 일생을 중심으로 저술을 하는 이충렬 작가의 김홍도 저작은 매우 충실하게 재현되어 김홍도의 일생을 되새겨볼수 있는 전기입니다. 안산 성포리 바닷가에서 중인 신분으로 태어난 것으로 보이는 김홍도는 당시 안산 수암동 부근에 살던 강세황에게서 회화의 기초인 화결을 배우고 그뿐만 아니라 당시 시서화 삼절로 불리며 예림의 총수인 표암 강세황 수하에서 당대 선비와 예인들이 가진 고상한 기품과 자세를 보고 자랐습니다. 김홍도가 살던 시절의 안산 지형 - 김홍도 미술관 강세황이 성포리 성고 단원에서 바로옆 첨성리 주변에 살던 성호이익가문의 여주이씨 들과 시회를 열고 조선시대 전국에 네곳이 존재한 만권의 책이있던 만권당에 살던 처남 유경종의 청문당을 드나들며 학문과 예술에 힘쏟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표암과 ..
김홍도 미술관 전시 - 소년 김홍도 노적봉에서 세상을 담다 이전에 김홍도의 어린시절 살던곳이 안산 성포리 노적봉 인근 바닷가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바닷가가 아닌 아파트로 둘러쌓인 동네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서호라 불리는 바닷가였습니다. 단원미술관에서 김홍도미술관으로 이름을 변경해 조금은 어색했지만 적응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입에 붙어서인지 단원미술관으로 아직도 부르게됩니다. 김홍도미술관 3관에서는 김홍도가 어린시절 이곳에서 살았던 기록들과 당시 이곳의 풍경들을 재구성해보는 전시입니다. 2022년부터 시작된 전시로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조선시대 안산지도 성포리 노적봉 인근에 살던 김홍도와 수리산 수암봉아래 살던 강세황 바로옆 부곡동에는 진주유씨들이 살았는데 청문당 경성당 두개의 만권당이 있습니다. 부곡동과 노적봉옆 첨성리에는 성호이익 선생의 성호장이 ..
김홍도 병진년 화첩 단양팔경 산수화 사인암 - 단원 절세보첩 단양 사인암(丹陽 舍人巖)은 역시 단양에 있는 8개의 절경중에 하나입니다. 사인암의 명칭 유래는 고려시대 이곳에 우탁 선생이 정4품 사인벼슬을 하며 지내던 곳이라하여 생겼습니다. 암벽에는 우탁의 글이 남아있습니다. 사인암은 단원 김홍도가 그리기위해 1년을 심사숙고했다고 하는 곳입니다. 독특한 절경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한 고민을 오랫동안 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작위적으로 멋있게 꾸민듯한 사인암 책을 쌓아놓은듯한 모습으로 조선시대에는 많은 선비들이 방문했고 많은 글귀들을 새겨놓기도 했습니다. 사인암 옆에는 청련사가 있고 사인암에 오르면 삼성각을 만날수 있습니다. 단원이 1년간의 숙고를 하고 그린 사인암 단원의 산수화는 실경에 가깝게 그린것들이 많은데 실제와는 약간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수 있습니다. 단원의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