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역할이 가져온 역사의 반전 : [도서평]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 박훈 민음사

Posted by 놀이터 추억보관소
2015.11.08 00:34 세계사 놀이터/일본사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느가에 대해 사상사적 변화점과 정치적 정황을 분석한 책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고있던 것은 미국 페리호의 자극속에서 막부의 쇄국적 정책에 반기를든 요시다쇼인같은 일부 사무라이들의 반란속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알고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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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해준이후 알고있는 것처럼 조선반도 침략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기염을 토했고 이후 미국에게까지 전쟁을 걸면서 태평양전쟁까지 일으켰지만 결국 패망하면서 막을 내린 시대까지로 군국주의의 절정을 이루던 우리에게는 매우 침울했던 시절을 의미하는 이야기이기도합니다

이외에 크게 관심을 보일일이 없던게 메이지유신이기도 합니다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이후 실권을 장악하고,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낭인들을 동원했던 오사카 전투에서 패퇴한 이후로는 대체로 커다란 전쟁이 없는 시기로 들어가게됩니다

이삼백년 가까이 전쟁이 없었다는건 사무라이들이 점점 할일이 없다는 의미가됩니다

사무라이 계층은 기본적으로 무사집단으로 조선의 선비처럼 공부하지는 않지만 상위 계층으로 군림하면서 특별히 다른일에 비중을 두지 않는 집단입니다. 따지고 들어가면 녹봉을 받는 일종의 직업적인 군인세력입니다. 그렇기에 평화시기라는건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군림하는 계층으로서의 권리행사를 할수있을만한 영역이 점점 줄어들는것을 의미하며 조선의 선비로 따지면 벼슬길에 못나가 망해가는 양반 집안과 같아지게 됩니다. 실제로도 박봉에 돈을 빌리고 상인계층에게 빚독촉에 시달리는 사무라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건 이런 시기에 발생한 사무라이 계층에게 일어난 변화를 연구한것

처음에는 조금 이해가 안간부분이었는데 이시기에 성리학이 깊숙히 들어가기 시작했다는점입니다.

미국 페리제독의 개항요건에 부적절하게 대응한 막부체제에 불만을 품은 일부 사무라이들의 반감에 따른 역사의 우연성이었다고 알고있었던 사건이 실제로는 오랜기간 축적된 주자학적 경험의 여파라는 부분으로...  대표적 정한론자인 요시다쇼인이 맹자를 강독하고 교육기관을 운영했으며 도망가지않고 권력자에게 대항하는 지사적 풍모를 보여준게 이런 영향아래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


사무라이 계층은 원래 경서공부를 하지 않는 계층이었습니다. 수백개로 쪼개진 전국시대의 군사국가에서 공자와 맹자왈 하는것은 무의미한것이었을터.. 하지만 임진왜란이후 도쿠카와 막부체제가 들어서면서 전쟁이 없는 시기가 오랫동안 지속.. 일부 있었던 주자학적 연구자들의 외연이 사무라이 계층에게까지 번지게 되었고 막부말기에는 조선의 상소와 같이 상서제도가 자리잡으면서 조선의 사대부처럼 사무라이 계층이 변화하면서 정치에 깊숙히 개입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러한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내각제 비슷한 막부의 정치체제라는 것보다 원래의 왕권을 가진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 즉 막부대신 자신들이 조선의 사대부와 같이 정치적 지배계층이 되려했던 흐름으로 전개되었다는 분석


하지만 막부의 권력이라는게 중세부터 일본 역사를 관통하는 정치체제였고 아들과도 나누지 않는 절대 권력을 쉽게 내줄리 없었는데 커다란 전쟁없이 그나마 조용하게 권력이양이 가능하게된 것은 하나의 변수가 있었는데

 

최후의 막부체제의 실권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사진속 인물)로 마지막 막부이긴 하지만 상당히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았는데 그의 약점은 그가 속한 가문이 방계중에 방계였기에 다른 가문의 견제를 많이 받았고 역으로 가장 큰 지지세력이 되어야할 곳에서부터 도움은 얻지 못하는 상황 

이 갈등의 원천에는 대단한 성격을 지닌 아버지 미토번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영향으로 그는 미토번 번주가 된이후 정치적인 발언이 금기시되었지만 국방정책등을 위해 후궁인 오오쿠의 예산을 줄이자는등 발언들을 해와 미운털이 박혀있었던것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유능한 아들이 실권자가 되었지만 막부 내부의 지지기반이 너무 취약했던것


하지만 그는 현실을 보는눈이 상당히 정확했던 인물로 평가받고있었고 대국적으로 일본 내부의 출혈을 줄이기위해 대정봉환이후 역으로 치고들어온 사쓰마번 조슈번의 공격을 받게되었을때 의외로 쉽게 권력을 내주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음. 나름대로 권력을 지키기위해 개혁성향도 강했던 인물로 최신 무기로 무장한 3만의 병력이 있음에도 조슈번과의 내전으로인한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위해 이전에 있던 전쟁에서 만큼 대항없이 권력을 이양.. 이로인해 무기력하게 권력을 내주었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은 인물


막부세력과 반란군의 전쟁이 대규모로 벌어지기 직전 막부에게 결정권을 위임받은 가쓰 가이슈(勝 海舟 -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는 전쟁으로 인해 발생할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 그리고 배후에 버티고있는 영국 프랑스의 개입등을 고려해서 절충방안으로 막부체제를 해체했는데 일본으로서는 대단히 현명한 판단이었고(조선에게는 일본이 이로인해 권력이양으로 메이지유신으로 접어들고 이후 일본의 침략을 받게되는 이유가 되는 결정이 되는셈) 막부체제에게는 마지막을 가져다주는 결정


도쿠카와 요시노부 - 마지막 막부 이후 사냥이나 사진등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함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 - 금기시되었던 막부에 대한 정치적인 발언을 강하게 하면서 반발을 사게됨


가쓰 가이슈(勝 海舟) - 막말 유신기의 정치가 막부체제의 종료를 가져다 주었지만 커다란 출혈이 예상된 내전을 중재

후일 막부였던 요시노부를 메이지유신 세력보다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짐

사카모토 료마나 사이고 다카모토는 그를 암살하려 갔다가 제자가 되었다 함



막부인 요시노부의 정치적 판단이었던 대정봉환(大政奉還 -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는것) 하지만 막부체제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이토 히로부미등이 있던 조슈번의 반발로 무진전쟁 내전상태가 되었고 이후 커다란 출혈을 피하기위해 타협하면서 막부체제는 종료하게됨



메이지 유신이후 주자학의 영향력이 크게 발휘하면서 한순간 많은 기대를 받았는데 상당히 많은 인구였던 중하급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위해 왕권강화를 꿈꾸었고 청이나 조선처럼 군현제가 이루어지리라 기대했지만 이후 급속한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부국강병책을 쓰게되었고 이런 과정속에서도 이들 사무라이의 우리의 경우처럼 주자학적 신념에 의한 반대가 일었던게 아니라 오히려 가교역할을 하게되는데 이유는 주자학이 이데올로기적 이념이 아니었고 단순히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 즉 도구였던셈...


메이지 천황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은 메이지유신이 단순히 서양의 근대문물이 가져다준 충격만이 아닌 

내적으로 막부말기부터 메이지유신이 발생한 시점에 사무라이 계층에게 성리학의 영향이 크게 자리잡았다는 것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은 성리학을 거의 종교적인 신념처럼 떠받들던 조선은 망하고 일본은 메이지천황시절 한순간 반짝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다 결국 자충수로 망하긴 했지만(미국의 개항요구등 서구가 팽창하던 당시에 억압적 상황이 있었음에도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점) 어떻게 근대문물을 유연하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가장 큰 차이점을 당쟁에서 찾았습니다. 

조선은 극심한 당쟁의 폐해로 영정조 시절 탕평책까지 쓰면서 안정시켰지만 이후 세도정치가 득세하면서 당쟁이 무의미해지면서 폐해도 있었지만 동시에 가져올수 있는 건설적인 경쟁과 토론도 급격히 줄어들면서 권력의 견제장치인 상서제도도 유명무실해진 사회가 되었고 점차적으로 문화가 쇠퇴하면서 서서히 몰락해갔는데 반면 일본은 주자학이 내적으로 발흥하면서 여러 정파들이 대립하긴 했지만 정치행위를 하면서 독단이 발생할수 없는 전체적인 판단의 유연성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고 사무라이는 이전시대처럼 단순한 무사가 아니라 사대부처럼 변하게 되었던점이 정치적으로 활력이 되었던 것으로 분석(물론 우리에겐 비극이되었지만 저자의 분석을 대입시킨다면 당시에 조선이 정신차리고 있었다면 오히려 역으로 되었을수도 있는...)


오래전 김용옥의 노자철학이것이다에서 오규소라이의 작위론을 접하면서 주자의 자연개념을 내용적으로 거부하는 성향이 일본의 주자학이라 이해 했었는데 주자학이 발생한 중국보다 더욱더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이나 이를 거부하던 일본의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만 있었는데 큰틀에서는 맞아들었지만 다른 정치적 상황에서 좀더 디테일한 부분의 차이점과 흐름을 볼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메이지유신은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과 다르게 지도층 바깥에서의 혁명이 아니라 지도층 내부에서의 혁명이라는점이 다르다고 분석했고 이러한 사회적 틀은 메이지유신이후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그 틀을 벗어나지 않을것으로 예측


성리학이 이런 사회변혁의 기폭제가 되리라는건 물론 여러가지 여건과 시기가 있겠지만 이런식의 변화를 이끌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분석


사족


성호 이익의 통찰

성호사설에서 일본의 이야기를 듣고 백여년이나 지나야 일어날 일을 통찰해냈다고함 그의 분석을 엿볼수 있는 대목 

왜황이 실권한 지가 불과 6, 700년밖에 되지 않는데 국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어서 그 사이에 차츰 충의로운 사(선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명분이 바르고 주장이 이치에 순하니 훗날 반드시 한 번 그 뜻을 펼칠 날이 올 것이다. 만약 에조가시마인들과 연결하고 왜황을 보좌해서 제후들에게 호령한다면 필시 대의를 펴지 못하진 않으리니 66개 주의 태수들 가운데 어찌 뜻을 같이 해서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만약 그러한 지경에 이른다면 저쪽은 황제이고 우리는 왕이니 장차 어떻게 대처하려는가?


조선과 일본의 상대국가에 대한 무시

서로 내리깔면서 얕보는 상대로 나오는데 조선은 일본을 섬나라 미개인정도로 취급하고 

일본에서도 조선은 청나라 속국 정도로 생각하면서 무시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퍼블릭도메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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