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선생의 호가 성호(星湖)인것은 별을 보던 호수가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별의 의미는 서정적인 의미도 담겨있지만 당시 서구의 과학이론들이 북경을 통해 이미 많이 들어와있었고 성호 이익은 부친 이하진이 북경 유리창을 통해 들여온 수천권의 장서를 섭렵한 상태였습니다.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성호 집안의 손자이자 제자이기도했던 이가환이 신유박해때 천주교 수용으로(그의 천주교 수용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옥사하면서 채제공을 이을 남인의 차기 정승이자 조선의 수학 천재가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가환은 정조가 극심한 당쟁속에서도 남다른 학식을 인정하고 여러번 보호해주던 천재였습니다.
안산 도시개발이 시작되면서 여주이씨 집안의 묘역이 대부분 이장되었지만 성호 이익 선생의 묘만 주변의 반대로 남게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학인들이 드나들던 성호장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부근의 어린이 놀이터에 표석으로만 남았습니다.
입구 옆 잘보이지 않는 구석에 세워져 있는 표석이 안타까움을 주고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런 표석을 세워둔 것이라 할수있습니다. 2015년에 안산문화원에서 세운 것으로 이전에는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실제 성호장 위치가 표석이 있던곳인지는 조금 의문입니다. 이 주변인건 맞는것 같지만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지! 오래전 일동 사진을 보면 조금더 점성공원쪽에 가까웠을것으로 생각됩니다.
첨성 어린이공원내에 있는 성호장터 표석
표석이 세워진 첨성 어린이공원
놀이터 뒤 전봇대 뒤에 보이는 점성공원
성호장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사극에서보던 아주 큰 사대부가의 저택이 떠오를수 있지만 성호이익은 모친 사후에 가문에서 내려준 땅과 노비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셋째형 옥동 이서가 써준 육영재(六楹齋)라는 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에서 매우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성호의 수제자라 할수있는 동사강목의 저자 순암 안정복이 찾아왔을때 명성에 비해 누추한 거처에 놀랐다고했고 성호선생의 지론인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선비의 당연한 가난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선생의 모습에 더욱 감동을 받았다고합니다.
안산 개발전 성호장터
성호장 연못터
성호장에 있던 느티나무
사진출처: 안산의 땅이름이야기 - 안산문화원
한동안 이익선생묘에 느티나무가 한그루 큰게 있어 혹시나 옮긴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만 일단 결론은 알수없습니다.
위에있는 흑백사진속의 야트막한 산은 성호이익 선생이 살던 점성촌(현재 점성공원)으로 당시 여주이씨들의 시회를 모아둔 섬사편과 단원아집의 배경중 한곳으로 반대편은 현재 골프장 제일CC가 있습니다.
성고(聲皐 안산 일동 성포동)에서 열였던 시회를 모은 단원아집(檀園雅集)에 소동파의 空山無人 水流花開(빈 산에 사람은 없어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시구를 운으로 삼아 시를 지며 풍류를 즐기던 공간
점섬공원으로 표기된 안내도
배수장 부근에서 바라본 점성촌
배수장 너머 보이는 노적봉
배수장 부근에서 바라본 일동과 구룡산 - 상록수역방향
다산 정약용이 성호장에 들른후 남긴 시 다산은 성호선생의 마지막과 거의 맞물려 태어났기에 성호이익을 생전에 만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성호이익을 사숙했다고 말했습니다. 설총 포은 목은 퇴계이후의 학맥을 성호 선생이 이어갔다는 의미
섬촌의 이 선생 옛집에 들러서
[ 過剡村李先生舊宅 ]
만세에 도맥이 동쪽으로 전하여
설총이 처음을 연 뒤로,
전통이 흘러 포은 목은에 이르러
충과 의를 오로지 이루었고,
퇴계는 민학의 진수 밝혀
천년 뒤에 종지를 얻었으니
육경 풀이에 다른 뜻이 있지 않아
학자들이 함께 현자로 추대했다네.
맑은 기운 동관으로 모여들고
밝은 문채 섬천에서 빛나니
학문 취지 공자 맹자에 가깝고
경전 주석 마융 정현의 뒤를 이어,
몽매한 상태에 한 줄기 길을 트고
굳게 잠긴 자물통을 열어 주었으니,
지극한 그 뜻 헤아릴 수 없어라
운용이 은미하고도 깊숙하다.
過剡村李先生舊宅
道脈晩始東
薛聰啓其先
傳流逮圃牧
忠義濟孤偏
退翁發閩奧
千載得宗傳
六經無異訓
百家共推賢
淑氣聚潼關
昭文耀剡川
指趣近鄒阜
箋釋接融玄
蒙蔀豁一線
扃鑰抽深堅
至意愚莫測
運動微且淵
해석 출처 - 섬촌의 이 선생 옛집에 들러서 (naver.com)
섬촌의 이 선생 옛집에 들러서
정약용이 1783년 안산의 선영에 참배하고 섬촌에 있는 성호 이익의 옛집을 방문하여 지은 장편시. [번역] 섬촌의 이 선생 옛집에 들러서 【이때 안산의 선영을 참배하였다.】 만세에 도맥이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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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생각에 성호장의 복원은 그의 생전과 사후에 교류하던 18세기 수많은 학자와 표암같은 예인들의 발자취를 복원하는 의미가 크게 있어보입니다. 성호장과 지금은 골프장에 막혀 공간상의 제약이 있지만 여주이씨 혈족들과 표암등의 예인들이 섬사풍류를 즐긴 단원과 단구의 재현도 노적봉과 점성공원 일대에 조성하는 것도 생각해볼만하겠습니다.
성호장 복원은 지금은 복잡한 주거공간이라 남양주 다산의 생가 유적지처럼 꾸미기는 힘들겠지만 가난을 벗삼아 검소하게 생활하며 공부하던 성호 선생의 소박한 주거공간을 재구성하는 것은 충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장소는 원래의 생가터가 좋겠지만 현재의 성호공원내에 육영제와 성호장 연못을 기념해서 복원하는것도 방법이 될수있을듯...
마침 성호공원에는 성호박물관 부근에 조그만 연못도 하나있습니다.
일동 점성마을 예전사진
안산일동 점성마을 1979년 사진과 2019년 성호공원 11월 가을 풍경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지나고 있습니다. 비가 많이 오지 않아서 가을빛이 지난 2-3년보다는 가을색이 떨어지는데 그래도 가을은 가을.. 안산 일동의 1979년 사진 앞에 보이는 논이 지금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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