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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 방문/조선왕릉

[연재]동구릉 원릉 능침 영조 정순왕후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로 15세의 나이로 당시 66세의 할아버지였던 영조와 국혼을 하게됩니다. 왕비 자리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지만 요즘 같아선.. 할아버지와 손녀뻘... 더구나 정순왕후는 정조 독살설의 주인공으로 나쁘게 묘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10여년전 심환지와 정조의 밀서가 발견되어 독살설은 지금으로선 사실무근인게 밝혀졌지만 그전까지는 정조사후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는 시기의 권력자로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장용영 해체나 천주교 박해등등..

 

하지만 실록을 통해본 정순왕후는 나름 정치적 식견이 높고 중립적인 인물로 평가됩니다. 헬조선으로 불리는 조선말의 세도정치는 왕권이 강화되었을때 극심한 당쟁이 사라졌다 왕권이 약해졌을때 권력의 쏠림 현상이 몰고온 것으로 보기도합니다. 정조가 사후에 순조를 부탁한 장인 김조순은 겉으로는 매우 유순하고 온화한 인물이었고 거기에 똑똑한 명문가의 자제였습니다. 다르게보면 처세의 달인이기도 했습니다.

 

정순왕후는 간택시에 영조의 물음에 흡족할만한 대답을 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꽃은 목화로 백성을 따뜻하게 하기 때문이었고 넘기힘든 고개는 보릿고개 가장 맛있는것은 소금이고 가장 깊은건 사람의 마음이라 했으니 마음에 쏘옥 들었던듯.. 이외에도 아버지 이름이 쓰여진곳에 앉지않고 비올때 처마밑을 보면서 행랑수를 맞추었다는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당돌한 면도 있어 15세면 지금으로치면 중학생 소녀인데 궁에서 옷치수를 잴때 돌아서라는 말에 네가 돌아서란 호통을 치기도...

 

 

곡장 뒤에서 바라본 원릉 능침 - 2019년 6월

원릉은 1776년(정조 1)과 1805년(순조 5)에 조성되었습니다. 멀리 구리시의 아파트들과 뾰족하게 튀어나온 롯데월드를 볼수 있습니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영릉이 있던 자리로 당시 병풍석에 금이가 물이 들어간다는 말에 현종 14년(1637년) 현재의 여주로 천장을 했습니다. 당시의 석물들은 그대로 묻어두었다 숭릉 조성당시에 사용했고 나머지는 다시 묻었습니다. 이후 원릉 조성당시에 석물들의 처리를 놓고 고심하다 일부 사용할수 있는 것들만 쓰고 나머지는 다른곳으로 옮기지않고 묻혀진 그대로 두었다고합니다.

 

영조는 사후 서오릉 홍릉에 원래 정해진 자리가 존재했음에도 파한곳에 다시 능자리를 잡아 정조의 소소한 복수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실록기록을 보면 여러차례 고르고 고르다 가장 좋은곳으로 판명된 자리에 모신것입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쌍릉으로 장명등은 사각인데 매우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서쪽의 석물들

 

동쪽의 석물들

 

정순왕후 봉분과 혼유석 고석 그리고 연결된 난간석을 볼수있습니다.

 

장명등에서 바라본 석인

 

동쪽 무석인과 문석인 얼굴이 똑같습니다. 약간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다른 능의 석물에 비해 날렵한 몸의 형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쪽 문석인과 무석인 이전까지는 중계와 하계에 나누어 석물이 배치되었는데 이때부터 같은 공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시대의 새로운 변화를 감지할수 있습니다.

 

 

혼유석과 고석.  고석의 나어두문이 매서운 형태로 새겨져있습니다.

 

석마

 

석호

 

석양

 

영조 정순왕후 원릉 전경

 

이날은 왕릉에서 펼쳐진 야외 국악공연을 보러간날이라 시간에 쫓겨 10분정도 시간에 후다닥 보고 내려와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일정이었습니다.

 

KBS 역사스페셜 – 66세 신랑 15세 신부, 영조의 결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