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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 방문/조선왕릉

[연재]동구릉 원릉 영조 정순왕후 - 조선왕릉 폐릉지에 모신 정조의 복수?

동구릉의 원릉은 영조와 정순왕후가 모셔진 공간입니다. 영조는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던 군주이지만 생모인 숙빈 최씨가 천출이었기에 괄시와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인물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런 역경을 이기고 노론의 힘을 얻어 왕위에 올라섰습니다. 영조는 조선왕중에서 가장 재위기간이 길었습니다. 주변에서 걱정할만큼 소식과 채소위주의 식단이었는데 오히려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하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고기없으면 식사를 못하던 세종은 태종이 상중에도 고기먹는걸 허락했을 정도이니 영조와 비교하면 당뇨병등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던것과 대비됩니다.

 

동구릉 영조 정순왕후 원릉 - 2019년 6월

 

영조치세의 공적은 탕평책이나 백성과 친밀한 군주였다는 점이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이 일어났고 따지고보면 영조의 콤플렉스가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만들어낸 결과였다고 할수있습니다. 세손 정조는 이모든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내면에서는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복잡했을수 있습니다.

 

연잉군 시절의 초상화

 

51세의 영조 어진

 

영조는 생전에 원래 현재 서오릉의 첫번째 왕후인 정성왕후의 홍릉 자리에 들어갈 준비를 해왔고 허우제라 불리는 오른쪽 능상을 비워두었습니다(홍살문에서 바라보면 왼쪽이 비어있습니다. 왕릉의 용어는 산자의 시선이 아니라 묻혀있는 왕의 시선 방향이 중심으로 되어있습니다) 정성왕후와 영조의 사이는 무늬만 부부였다고 할수 있을정도로 냉했지만 마지막 자리는 확고하게 정했습니다.

 

서오릉 홍릉 정성왕후 정자각을 중심축으로 두기의 능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한곳만 들어가 있는걸 확인할수 있습니다. - 2019년 5월

 

영조사후에 정조는 원래대로 정성왕후의 홍릉옆으로 모시려했지만 좀더 나은 자리가 없는지 알아보라했고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소령원 부근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몇몇 반대에 조금더 알아본곳이 현재의 원릉자리입니다. 원릉자리는 원래 효종이 처음으로 묻혀있던 곳입니다. 병풍석 사이로 물이샌다는 말에 현재의 여주로 천장했습니다. 

 

보통 반가의 묘지도 파묘한 자리는 사용을 하지 않는데 왕릉을 하필 이런곳에 하는 의문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렇지만 효종 천장시에 병풍석에 물이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것으로 밝혀졌고 당시의 실록 기록이나 정조의 치세나 품성을 본다면 단순히 생부의 비극과 결부시키지는 않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낼수있습니다.

 

원릉 전경.. 수십보 전에 금천교가 있는데 사진이 없네요.. 2019년 6월

원릉은 정순왕후와의 쌍릉형식이지만 처음부터 설정된것이 아니었는데 정자각과 일직선상에 놓여지지 않고 처음 모습인 영조의 봉분과 일직선상에 맞추어져있습니다. 정순왕후 안장후 정자각 위치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공역 부담을 덜기위한 배려...

 

 

원릉의 판위

 

원릉 정자각과 향어로

 

원릉 수복방

 

수라간

 

정자각 정면으로 서오릉 숙종의 명릉에 있던 가정자각을 활용했다고합니다. 아마도 나중에 조성된 인원왕후의 능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

 

정자각 동쪽

 

정자각 서쪽

 

정자각 후면

 

신교

 

 

제향후에 축문을 태우던 예감으로... 예감에는 원래 덮개가 있었으나 안에 위생상태와 뱀이 들어가 있기도해 영조때부터 없앴습니다.

 

정자각과 산신석

 

 

 

원릉 비각에는 세개의 표석이 있습니다. 영조는 대한제국 시절의 추존 황제도 아닌데 다수의 표석이 있습니다. 영조의 묘호는 원래 영종이었습니다. 이후 고종대에 영조로 높여졌고 정순왕후의 표석은 합쳐지지 않고 별도로 세워졌습니다. 정확한건 찾아봐야겠지만 초기 표석에 있는 정조의 어필때문인가 생각해봅니다.

 

영종대왕 원릉 표석

 

영조대왕 표석

 

정순왕후 표석

 

 

 

정자각에서 바라본 홍살문

 

 

 

 

 

KBS 한국사전 – 아버지의 눈물, 영조

 

능침과 정순왕후 이야기는 이어지는 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