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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 방문/조선왕릉

[연재] 조선왕릉 태조 이성계 동구릉 건원릉 억새 절정기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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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결국 자식들간의 골육상쟁을 눈으로 보았고 가장 총애하는 신하 조선의 설계자였던 정도전마저 잃게됩니다. 후계구도를 제대로 설정하지못한것으로 애틋하던 신덕왕후의 베개밑 송사와 정도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세자 책봉은 결국 태종 이방원의 피의 복수로 끝을 맺게되었습니다.

태조 사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은 분해되어 방통교 다리밑에 깔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고, 태조가 살아있을때는 고향 함흥으로 올라가 부르려 오는 족족 화살끝에 사라져 함흥차사란 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후 무학대사의 권유로 되돌아오긴했지만 마지막에는 북방의 억새를 무덤에 심어달란 유지를 받들어 태종이 심게되었습니다.

 

 

 

아래는 태조 이성계 어진으로 소실되지 않았기에 실제의 태조 모습이라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어진은 실제와 똑같이 모사하는걸 원칙으로 했기에 이성계 얼굴에 있는 혹처럼 생긴 사마귀까지 그대로 그려내었습니다. 실제와 다르게 미화시키지 않는것이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입니다. 그 배면에는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에서 털오라기 하나만 달라도 다른사람이라는 정이천의 이야기에서 연유되었습니다.

 

관련내용보기: https://noleter.com/231

 

[도서평]조선시대 터럭하나까지도 같게 그려야...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 이성낙 눌와

조선시대에는 어진을 비롯해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습니다. 전에는 지금의 사진이나 많이 봐온 서양의 초상화와는 다른 정서를 지닌것이고 사실성이 떨어지고 현재와 상관없는 정도로 애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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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말과 태종의 선택으로 태조의 건원릉은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그렇게 함흥지방의 억새가 심어진 봉분으로 남게되었습니다. 동구릉이 있는 검암산이 건원릉의 장소로 확정된건 태종8년인 1408년 6월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건원릉의 모습

 

건원릉의 정리되지 않은 모습에 망국의 한이...

 

건원릉의 상설중 금천교에서 정자각과 비각 능침의 억새가 안보이는 시기의 모습은 이전에 쓴 하단 링크 참고

동구릉 건원릉 - https://noleter.com/238 https://noleter.com/239 https://noleter.com/240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조선왕릉 - 태조 이성계 건원릉 능침

건원릉 능침의 무석인 옆모습.. 앞서 이야기한것처럼 건원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능이란 점에서 커다란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조선왕릉의 표본이 되는건 고려의 공민왕릉이라고 볼수있습니다.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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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건원릉 정자각과 소전대 비각 - 구리 동구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정자각에서 바라본 능침으로 정자각에서는 제향을 지내는 공간입니다. 몇년전까지는 제구들을 황색천으로 덮어두지 않아 제구색으로 추존황제와 아닌걸 구분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모두 황색 천으로 덮어두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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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정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동구릉 태조 이성계 건원릉 금천교에서 정자각까지

조선왕릉은 42기중 개성에 있는 후릉과 제릉을 제외하고 모두 보존상태가 좋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물론 문제를 안고있는 곳도 있었지만 지금도 개선이 되고있다고 생각합니다. 능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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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태조 이성계 건원릉

 

2019년 10월 말에 찾아간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전경 파란 가을하늘과 고요하고 경건한 공간. 매년 이맘때 평소에 올라가보기 힘든 능침을 공개하는 행사를 진행합니다. 사전신청으로 한달간 진행되는데 거의 순식간에 예약이 종료됩니다. 평일이 많은걸 고려하면 상당한 관심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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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과 비각 그리고 살짝 보이는 능침. 정자각 하단을 보면 신계와 어계외에 목계가 보입니다. 조선을 개국한 임금으로 빈번한 방문과 규모로 인한것...

 

아래에서 바라본 능침 억새가 절정을 이룬 10월 말...

 

비각에는 조선 초기양식에 보이는 신도비와 표석 그리고 고종대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로 추숭된 표석이 같이있습니다.

 

조선왕릉중 표본이 되는 건원릉은 고려의 공민왕릉인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 만들어졌습니다. 현재 개성에 있어 가보지 못하는곳..

 

정자각

 

 

정자각의 걸고리로 제향시에 차양등을 설치할때 사용한걸로 추정..

 

 

 

 

 

정자각 뒷편의 신문교석(神門橋石) 줄여서 신교라고 많이 부릅니다. 동원이강릉등 왕릉에 따라서 길게 신로가 늘어진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솟아오른 강(岡; 경사면)과 연결된 지점까지 있습니다.

 

정자각 서쪽으로 625 한국전쟁당시의 총탄 자국들 육백여년의 세월을 전란을 지켜낸 곳이지만 가장 크게 생채기를 낸건 비교적 최근...

 

 

비각 부근에 심어진 억새들.. 건원릉을 상징하는 모습

 

 

정자각 아래에서 바라본 모습 강(岡; 경사면)으로 불리는 높이 솟은 공간입니다. 능침 공간은 조선시대에 임금이라도 함부로 올라가지 못하는 죽은 왕과 왕비를 위한 공간입니다.

 

능침(陵寢) 뒷모습 억새 절정기의 태조 건원릉은 영험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백년의 세월을 견뎌온 왕의 무덤 자리는 중국에서도 이름이 나있는 명당이라고 합니다. 사진을 찍은 위치는 잉(孕)이라 불리는 기혈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아이를 가지면 잉태한다고 하는데 그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멀리 구리시의 아파트가 보입니다.

 

1936년 조선고적도보의 사진과 비교..

 

함흥에서 가져온것으로 알려진 건원릉의 억새입니다. 태조의 마지막 남겨진 말로 북방의 억새를 심어달라했는데 후일 인조가 신하들에게 다른 봉분과 다른 이유를 물었을때 홍서봉이 청완이라 답한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습니다. 현재의 억새는 2008년 씨앗을 받아 사릉 종묘장에서 키워 2010년에 다시 식재한것입니다.

 

 

곡장뒤에서 바라본 모습

 

병풍석과 난간석이 모두 둘러진 건원릉 능침

 

서쪽 무석인과 능상아래 정자각 전경.. 왕의 혼이 왔다면 이런 형태로 보이겠습니다. 상단의 정자각 신교를 통해 혼이 이곳에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쪽 무석인 옆의 문석인

 

서쪽 문무석인

 

혼유석(魂遊石)으로 왕릉 능침에 올려진 네모 반듯한 돌은 일반 묘에서 볼수있는 것과 용도가 다릅니다. 혼유석은 혼이 노닌다는 의미로 왕의 혼이 이곳에 머무르는 공간입니다. 왕릉을 만들때 재궁(관)을 이 밑으로 길을 내고 밀어 넣습니다. 혼과백이 통하는 공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건원릉의 혼유석은 세월의 무게만큼 받침석인 고석 하나가 많이 훼손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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