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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 방문/조선왕릉

[연재]조선왕릉 동구릉 문종 현덕왕후 현릉 - 어찌보면 제일 아까운 군왕

2-5 동구릉 문종 현덕왕후 현릉

 

문종은 아버지 세종대왕의 그늘에 가려 그리고 재위기간이 짧아 과소평가된 왕이라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알고보면 당뇨로인해 평생 이병저병에 시달린 세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면서 해놓은 일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왕실 최초의 적통을 받은 세자로 어릴때부터 군주로서의 교육을 받았고 스폰지처럼 빨아들였던 똑똑하고 명민했습니다. 게다가 세종에게는 없던 병법이나 무기체계등 군대를 실제로 통솔하는 것에도 밝았다고 하는데 안타깝게 39세의 나이로 어린 단종을 두고 눈을 감은것이고 후일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문종은 세자시절 빈으로 들인 여인마다 문제를 일으켜 힘들었습니다. 첫번째인 휘빈 김씨는 문종이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지 소원했는데 이로인해 휘빈김씨는 압승술이라는 총애하는 궁녀의 신발을 태우는 주술을 행했습니다. 발각이되어 휘빈김씨는 폐빈이 되고 옆에서 이를 조언한 시녀 호초는 참형을 당했습니다. 

두번째인 순빈 봉씨는 세종과 소헌왕후가 고르고 골랐던 인물이지만 상상임신이나 술에 쩔어 살기도했고 급기야 궁녀였던 소쌍과 동성애까지 하게됩니다. 이를 알게된 세종은 문종의 관심에서도 떨어져있던 순빈 봉씨를 폐빈하게됩니다. 이후 회임중이던 현덕왕후 권씨가 세자빈에 오르게됩니다.

동구릉에서 재실을 지나 수릉을 지나면 나오는것이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동원이강릉입니다. 이곳은 문종사후처럼 사연이 많은 왕릉 가운데 하나로 1441년 현덕왕후 권씨가 세자빈 신분으로 단종을 출산하고 바로 산욕열로 죽어 안산의 소릉에 모셔졌습니다. 이후 문종은 등극한지 2년만인 1452년 죽음을 맞게되었고 원래는 세종대왕 영릉이 있던 지금의 헌인릉 옆으로 가길 원했지만 자리가 좋지않아 이곳에 모셔졌습니다. 그런데 능상은 다르지만 같은 정자각을 쓰는 동원이강릉은 세조이후부터 나타난 양식인데 어찌된 일일까요?

 

동구릉 재실과 수릉을 지나면 나오는 현릉의 정자각과 동원이강릉 능침

 

수양대군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낸후 자식들에게 우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처음 세자로 책봉했던 의경세자는 스무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세조사후 등극한 예종은 즉위한지 일년만에 급사하면서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아래 의경세자의 둘째인 성종이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의경세자가 죽을당시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저주를 퍼부어 죽었다는 야사가 있습니다. 물론 시간상 맞지않지만 소문이라는게 사실여부를 떠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싶었던 심리가 투영된것이기에..

 

아래 사진은 세조의 실제모습 일제강점기 어진화사였던 김은호 화백이 그리던것중에 남은것으로 어진은 사진처럼 모사하는게 원칙이고 털오라기 하나만 틀려도 그사람이 아니라는 원칙아래 그려졌기에 실제모습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영화 관상에서의 이정재의 흡사 야수같이 소름돋는 연기와는 조금 인상이 다르게 나름 두루뭉실하게 생겼습니다. 현재 어진은 태조와 영조 철종 고종 순종을 빼고는 상상도입니다. 나머지는 한국전쟁당시 전부 불타 사라졌습니다.

세조 어진은 임진왜란당시 광릉 능참봉이던 이이첨이 왜군들 틈에서 빼내 혈혈단신 선조에게  달려왔는데 이후부터 광해군때에 출세가도를 달리기도 했습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세조어진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2018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세조가 꿈을 꾼이후 현덕왕후는 파헤쳐지고 관을 안산 바다에 버려졌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야사도 전해집니다. 지금도 그 터는 관우물이라 불리는데 현재는 공장(일진전기)부지안에 표석으로만 위치해 제대로 찾아보기도 힘들고 소릉터는 더욱 찾아보기 힘듭니다. 다만 당시 남았던 소릉의 석물들 몇개가 안산문화원에 전시되어있습니다.

이후 현덕왕후는 중종때 복원되어 이곳으로 옮겨지며 현재와 같은 동원이강릉 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동구릉 역사문화관에 있는 현릉 안내

 

 

수릉을 지나면 나오는 곳으로 현릉 금천교 홍살문과 사이에 탐방로가 있어 지나치기 쉽습니다.

 

 

 

왕릉의 기본적인 구조는 궁과 같습니다. 경복궁으로 치면 금천교지나 홍살문은 근정문 정자각은 근정전 능침은 잠을자는 침전인 강녕전과 같은 구조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동구릉 입구의 외홍살문은 광화문으로 볼수 있습니다.

 

홍살문과 향어로입니다. 정자각 위치에서 보듯이 독특하게 꺽여져 있습니다. 조선왕릉은 디테일하게 보면 조금씩 다른데 가장 큰 이유는 지형에 맞춰 조금씩 변화를 준것들이 있기때문입니다. 기본적인 구조는 있지만 지형에 따라 만들어진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이유입니다.

 

녹음이 푸른 여름철 모습

 

현릉 안내표지

 

현릉은 조선 제5대 임금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으로 동원이강릉이다. 문종은 세종의 맏아들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재위 3년동안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했다. 현덕왕후는 권전의 딸로 왕비가 되기전에 단종을 낳은 후 곧 세상을 떠나 경기도 안산에 안장되었다. 이후 문종 즉위년에 소릉으로 격상하였으나 단종의 복위사건으로 세조가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중종8년에 이곳으로 옮겨 조성했다. 서쪽이 왕릉이고 동쪽이 왕비릉이다.

 

현릉의 판위(배위라고도 부릅니다) 보통 홍살문 안쪽에 위치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수릉과 마찬가지로 복원 잘못으로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다만 조성당시의 정확한 기록이 없기에 그대로 둔것으로 보입니다.

 

홍살문 너머의 풍경 2019년 가을에 갔을때 태풍으로 홍살문이 무너져 없었는데 늦가을에 갔을때 복원이 되어있었습니다.

 

특이하게 꺽인 향로와 어로

 

능지기들이 머무르던 수복방

 

제향때 음식을 잠시 보관하는 수라간

 

현릉 정자각과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침전경. 사진에서 왼쪽(옛기록 왕릉은 능침안의 왕의 시선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이 문종 오른쪽이 현덕왕후입니다.

왕릉은 쌍릉이나 동원이강릉의 경우 위에서 이야기한것처럼 봉분의 왕의 시선을 기준으로 오른쪽이 대부분이고 예외적인 것은 서오릉의 경릉입니다. 경릉은 추존왕인 덕종이 세자시절 죽었고 소혜왕후는 추존이후 왕비이자 성종의 친모로 대비(사극에서 연산군의 할머니로 머리에 받친 인수대비가 이분)이기도합니다. 조선왕릉은 죽음 당시의 신분이 기준이었습니다. 합장릉의 경우는 역시 봉분안의 왕의 시선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안치됩니다.

흥미로운 사례는 서오릉 홍릉으로 영조의 첫째부인인 정성왕후의 능으로 사후에 영조가 들어갈 목적으로 우허제를 적용 오른쪽을 비워두었는데 손자인 정조는 동구릉 가운데 효종의 초장지였던 곳으로 정해 이부분도 재미있는 해석을 해볼수 있습니다. 서오릉의 홍릉은 그래서 쌍릉의 형태로 자리와 석물이 배치되었지만 한쪽만 봉분이 있는걸 볼수 있습니다.

 

현릉은 1452년 문종 사후 조성되었고 현덕왕후는 그이전에 단종 출산후에 안산에 안치할때 세자빈의 신분이었기에 묘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당시에는 세자나 세자빈에 맞는 왕실무덤의 형식이 없어 능보다는 낮게 공주묘보다는 높게 지내라는 세종의 명이 있었습니다. 이후 원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들의 기준이 세워지게되었다고 볼수있습니다.

문종 등극후에 왕후로 격상되어 소릉이 되었습니다. 단종은 어머니 현덕왕후의 소릉에 능의 형식에 맞게 석물등을 상설했습니다. 현재의 현릉으로 천장된건 1513년 중종때의 일로 문종의 위패를 혼자만 모실수 없다는 많은 상소와 논의 가운데 갈팡질팡했지만 이때 종묘에 벼락이 내려친후 결정되었습니다.

 

 

정자각과 현덕왕후 능침 단종을 출산하고 바로 사망해 안산 소릉에 위치했다 세조에 의해 파헤쳐지고 이후 중종때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정자각의 신계와 어계

 

정자각 측면

 

정자각 후면의 신교와 신로 이길을 통해 제사를 받은 혼이 능침으로 올라갑니다. 즉 왕과 왕비의 혼이 다니는 길입니다.

 

현릉에는 현덕왕후쪽으로 신로가 길게 이어져있습니다.

 

현릉 비각

 

 

 

현릉 문종 능침의 석물

 

 

안산 소릉터에 있었던 석물중 석양입니다. 조선 초기 양식으로 석양은 봉분주위에 석호와 배열하며 사악한것을 쫓아내는 벽사의 의미를 가집니다. 애석하게 며느리를 먼저보낸 세종이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현재 소릉터는 흔적도 없고 들어가보기도 힘든 장소입니다. - 안산문화원

 

아래 사진은 소릉터의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으로 대부분 도깨비인 나어두문이 새겨져있는데 특이하게 북고리 모양입니다. 조선왕릉 중에서는 예종의 창릉에서만 볼수있었는데 소릉터의 고석에서 북고리 문양이 새겨져있어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이날 안산문화원의 학예사님과 한창 대화를 하기도했습니다. 1970년대까지 있었던 성호 이익선생의 집터인 성호장의 아쉬움을 한참동안 이야기했습니다.

안산에있던 소릉은 단종이 기제사를 지내기위해 내려왔던 조선왕조실록 기록이 있고 이후 수리산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았습니다. 소릉터에 지금같았으면 보존을 하거나 기념관 혹은 제대로된 표석이라도 세웠겠지만 지금은 공단 한가운데 공장부지안에 위치해 둘러보기도 힘든곳에 있습니다.

소릉에 관한건 따로 정리를...

 

동구릉 현릉 위치

 

안산문화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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