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동 기행]구러시아공사관과 고종의 아관파천

Posted by 놀이터 추억보관소
2015.05.12 18:31 역사유적 방문/유적지

조선왕조 오백년 말기 그동안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제외한다면 사회가 급속도로 변한 것은 조선말기 대한제국 시절로 초기라 볼수있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은 외부의 침략에 이백여년 가까지 전쟁이 없었기에 설마했던 무사안일했던 측면과 실질적인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명분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측면이 있었다면, 구한말은 산업혁명이후 급속도로 팽창한 서구의 근대화를 쫓아가는 시기를 놓쳤기에 우리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열강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 거기에다 안동김씨 풍향조씨같이 왕위에 군림한다시피할정도의 외척의 발호등 정조사후 부패의 정도가 조금씩 조금씩 심해져 국가의 질적인 면이 서서히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었기에 급기야 외세의 입김에 바람처럼 몰려다니던 시절

우리가 알고있는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1895년 을미사변으로 무참하게 명성황후가 죽었고 이후 불안을 느낀 고종.. 친러파 이범진(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위종의 아버지)과 베베르가 협의를 해두었고 일본의 경계를 엄상궁이 평소 낯을 익히고 뇌물로 친밀하게 해둔덕분에 가마를 타고 궁궐을 빠져나가 그대로 러시아공사관으로 직행..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모습 경운궁과 비밀통로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박색으로 유명했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영친왕을 낳은 엄상궁은 나중에 순헌황귀비가되며 황후의 자리까지 오르게됩니다.

정동길에 위치한 구 러시아 공사관 건물 625때 대부분 무너지고 현재는 망루만 남은 상태

 

구러시아공사관 동영상

 

구러시아공사관의 원래 도면 현재는 푸른색으로 표시된 탑만 남음

러시아 공사관은 을미사변 당시 현장 목격자이기도한 사바틴이 설계한 건물 1885년 착공되어 1890년 완공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이후 공사관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지만 1949년까지 실제로 사용

한국전쟁중에 크게 훼손되었고 그후 복원되어 남은 것은 현재의 망루

 

고종은 아관파천후 독살을 염려해 통조림만 먹었다고 전해짐.

 

 

을미사변은 서유견문의 저자인 유길준이 연루되었다는 설이있고 윤치호는 그날 만난 유길준에게서 이런 모습을 감지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유길준은 명성황후와 적대관계였던 흥선대원군과 선이 닿은 상태였고 이를 실행에 옮겼는데 후일 편지에서는 일본에 손을 빌린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는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하기도..

아관파천이후 고종은 김홍집 내각을 해체하고 유길준은 체포하라고 명령.. 결국 김홍집 어윤중등 당시 내각은 반일 감정이 극도에 달했던 대중들에게 죽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도망.. 하지만 이후 행보를 보면 유길준은 을사늑약과 일본의 한일합병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고종을 밀어내고 대한제국 황실에서 유일하다할 수 있을정도인 반일을 내세운 의친왕 이강을 추대하려고도 기도했지만 실패

아관파천 이후 아라사 러시아는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이를 좌시하지 않던 일본이 선전포고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 일본이 승리하면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미국과 맺어 서로의 권한을 챙기고 고종을 협박하고 먹히지 않자 이완용등 대신들을 이용해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권한을 못박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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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당시의 일본 낭인들.. 한성신보사앞에서 기념사진까지...

일본 전국시대 낭인들은 패전으로 주군이 사라졌거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같이 격하된 무소속이 되버린 무사들이었는데 정식 군인에 편입되지 않은 그때그때 일을 따라다니는 무력집단이랄 수 있습니다. 일본은 전국시대이후 넘처나는 이들 낭인계층이 사회적으로 문제였는데 일정한 직업을 가지기 힘든 계층으로 궁핍하지만 무력을 갖추었기에 용병으로 쓰일수도있었는데 실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엄청난 축재를 하고있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어머니 본명이 차차로 현재 사극 징비록에 나오는 요도기미.. 히데요리는 거의 엄마 치마폭에 덮여사는데 이들을 비호하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세키가하라 패전이후 처형된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사카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를때 이들 낭인부대를 동원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표면적으로 애국심이나 이런걸도 위장한 정치깡패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이들을 동원한건 일본측의 교묘한 계산이 깔린것으로 은폐나 나중에 책임회피를 하기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외세에 기대는 개혁이나 권력의 유지가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준 근대사의 단면으로 갑신정변이나 청나라에 손을 내밀다 청일전쟁후 러시아로 선회하던 명성황후의 최후 그리고 한때 쇄국정책까지 고집했었지만 며느리와 권력다툼을하던 흥선대원군의 일본에 손내밀기등 외세를 등에업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으로 설혹 성공하더라도 커다란 댓가를 치룬다는것을 보여주었는데 이후 1897년 여론에 못이겨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지만 이미 우리나라의 권리는 열강들에 의해 조각조각난 상태..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채굴권 경원과 종성의 광산 채굴권 경원전신선등 여러가지 경제적 이권을 챙겨갔고 다른 나라들도 동등한 조건을 요구하면서 철도부설권등 여러가지 권리를 헐값에 가져간 역사.

 

구러시아 공사관 첨탑 정면 사진

 

 

첨탑 뒷쪽

 

첨탑 오른쪽.. 주변에 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서있어

현재 사용중이더라도 예전의 첨탑기능은 현재는 기능을 잃어버려서 유명무실...

 

첨탑 왼쪽

 

아래 공원은 원래 한국 가톨릭 수도원의 첫자리

 

아들의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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