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동기행]경운궁(덕수궁) 중명전 방문2 - 고종의 헤이그 특사(밀사) 파견

Posted by 놀이터 추억보관소
2015.05.07 18:20 역사유적 방문/고궁

앞에서 중명전의 건축 역사와 을사늑약을 살펴봤는데 구한말 대한제국 시기의 뼈아픈 역사를 볼수 있는곳입니다.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았던 조선 백성은 의병을 최익현이 일으키고 민영환은 자결을 하면서 울분을 터트렸는데..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

고종은 대표적인 친한파 헐버트에게 밀명을 내렸고 네덜란드 입국시까지 일본의 방해를 피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열리는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도착하게되었는데 본회장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탄원서 제출과 만국평화회의보등 세계 각국의 언론에 정부입장을 알리는등 외교적으로 활동 이들의 활동은 많은 공감을 얻어냈지만 당시 일본과 같이 제국주의적 침략을 이어나가던 영국등 대부분 서방국가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고 이준은 현지에서 객사하게 되고 이위종과 이상설은 재판이 열리면서 교수형과 종신형이 내려졌고 이사건을 빌미로 고종은 강제로 폐위되었는데 이후 경운궁(덕수궁) 함녕전에서 사망.. 독살설이 매우 유력하게 떠오르는 가운데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내줄때까지 1907년경까지 이곳 중명전에서 국사를 처리하던 곳

 

중명전 헤이그특사 동영상 보기

 

 

* 모든 이미지는 클릭하면 더욱 크게 볼수있습니다.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 임명장

 

 

고종황제의 거북모양 어새로 비밀리에 사용하는 문서나 편지에 사용한것으로 추측

 

고종의 노력가운데 하나인 친서 - 영국 트리뷴지의 스토리 기자에게 보낸 것으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

 

한국을 사랑했던 외국인 헐버트에게 고종이 내린 친서

헐버트는 죽기직전 한국땅에 묻히고 싶어했고 실제로도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1949년 정부의 초청으로 왔다가 사망했고 한국에서 양화진 아들곁에 묻힘

 

 

헤이그 특사의 탄원서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열린 2차 만국공회 초청장을 받았던 고종황제는 이준에게 밀명을 내렸고 이후 러시아를 가로질러 이상설 이위종과 합류한후 이미 열흘이나 지난시점에 헤이그 공회에 도착

의장국인 러시아와 개최국인 네덜란드의 부의장에게 참석을 말했지만 하지만 약소국의 권리를 지켜주는것보다는 강대국들의 권리찾기에 가까운 공회였기에 헤이그 특사는 이들의 비협조와 그리고 일제의 방해는 물론이고 영일동맹은 맺은 영국까지 합세해 공회 참석은 불가했고 차선책으로 대외적으로 외교적인 채널로 언론 상대를 했지만 우리입장에 대한 공감은 얻었을지언정 실질적인 효과를 끌어내지는 못함 약소국의 이야기를 들어 해결해줄만한 상황이 아니었던것

 

 

당시 만국평화회의보에 실린 고종의 헤이그 특사 1907년 5월 1일

기사내용 번역보기 - http://www.yijunpeacemuseum.com/04_hague/data_03.php

이위종이 유창한 외국어로 인터뷰한 기사

 

헤이그 특사이후 일제에의해 고종은 강제퇴위를 당하며 순종에게 권좌를 물려주었고 경운궁(덕수궁) 함녕전으로 옮기고

이준은 현지에서 사망한데다 일제는 궐석재판으로 이상설은 교형 이위종과 이미 순국한 이준에게는 종신징역을 선고했고...

 

현지에서 죽은 이준 열사의 사망기록

홧병에의한 분사설 감염설 자살설 독살설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려지지 않음

이준열사 기념관 웹사이트 - http://www.yijunpeacemuseum.com/

 

다시 국내로 돌아올수 없었떤 이들은 만주 러시아등지에서 마지막까지 항일 투쟁을 한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상설은 항일투쟁을 했지만 러시아 사정에의해 모두 중단되었고 이후 상해로 건너가 활동하다 러시아에서 생을 마감 

이위종은 1911년 주러 한국공사였던 아버지 이병진이 한일합병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후 러시아 국적 취득후 1차세계대전 참전후 사망한것으로 알려졌는데 정확한 사망원인은 알려지지 않음 후손들이 러시아에 살고있는중

 

중명전 앞에서 영친왕과 대신들 바로뒤 이완용의 모습 중명전앞의 친일 내각

이후 영친왕은 이토히로부미가 일본으로 볼모로 데려가고 한국인도 아닌 그렇다고 일본인도 아닌 상태로 살다 비극적으로 죽음

영친왕은 어쩔수없는 친일 전력때문에 귀국을 이승만 정권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서지 않았음을 돌이켜보면 자신들의 권력유지에 위험요소가 되지않을까 걱정했을수도 있는데 이후 박정희때 귀국했지만 이미 병색이 짙었기에 7년동안 거의 병원 생활하다 사망

그의 부인인 이방자여사와 함께 박정희에게 1963년 이곳 중명전을 기증받기도..

 

고종의 일가

왕세자 영친왕(실제론 동생) 순종 고종 순종비 덕혜옹주

 

철종사후 파락호를 가장한 야심가 흥선군의 아들이 선택되어 보위에 오른 고종은 재위기간이 상당히 길었는데  망해가는 나라의 군주로서 많은 노력을 했던건 사실이지만 대세를 거스를수 없었고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이나 외척의 발호를 견제하기 위해 선택한 고아인 명성왕후 하지만 흥선대원군과 외세까지 끌어들이며 권력다툼이 심했던데다 일본의 낭인들에게 말도안되게 죽임까지 당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는데 이모든 것을 지켜본 고종의 심정은 매우 참담했을듯..  하지만 그뒤에 기다리는건 좋은일보다 망해가는 나라를 지켜보는 것이었고 강제로 퇴위까지 당하며 마지막 죽음의 과정까지도 독살이 유력해보이는 고생을 많이했던 불운의 군주.. 고종이 60넘어 태어난 말년의 가장 큰 기쁨이던 덕혜옹주 역시 고종이 죽고나서 너무 어린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가 이후 강제결혼과 이혼등 순탄치 못한 인생역정으로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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