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동기행]경운궁(덕수궁) 중명전 방문1 - 정동의 유래와 중명전 건축 그리고 을사늑약

Posted by 놀이터 추억보관소
2015.05.06 23:52 역사유적 방문/고궁

2015년 5월 5일 어린이날

오랫만에 가보게된 정동일대.. 2013년 아들과 궁궐 탐방을 하던시절 한여름에 땀뻘뻘 흘리며 찾아갔던 경운궁(덕수궁) 이곳은 가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그림이나 보거나, 덕수궁 돌담길을 걷거나, 궁내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가던 곳으로 오래전 서울에 살던 시절만해도 안에는 몇번 들어가봤지만 그냥 따분하고 지루했던 기억.. 십대와 이십대 초반인 당시에는 조선시대는 아직도 이조시대라는 식민사관의 폄하세례때문인지 그리 관심가는 시대가 아닌 이미 망한곳으로 고리타분한 설교나 늘어놓던 시절정도로 치부했었던 무지의 시절이기도.. 하지만 아들과 궁궐 탐방을 하면서 이것저것 자료도 같이 찾아보고 관련서적도 다시금 보게되면서 학창시절 유난히 좋아했던 역사과목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면서 아들과 같이 지금까지 들떠있는중..

 

정동일대의 유적지는 중명전 복원과 정동제일교회 러시아공관 배재학당 이화학당등 근대사의 주요 인물과 주요 사건 그리고 건축물등을 볼수있기에 아직도 남아있는 인천 차이나타운 주변의 건물과 군산의 건물과 더불어 여러곳을 한번에 볼수있는 장소

특히 당시에 정동의 서양인들의 활동하던 주무대로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벨기등 각국 공사관이 들어섰기에 자연스레 외교가로 변모했고 더불어 배재 이화같은 교육기관은 물론이고 종교시설과 의료시설등이 자연스럽게 들어섰고 이후 서양 문물이 유입되고 활용되던 공간

정동의 유래는 1396년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도성안에 조성되면서 생겨났는데 아는것처럼 방번 방석의 친모. 이방원의 왕자의난으로 방번과 방석은 죽었고 강씨는 병사한후 이곳에 능이 조성되었지만 태종 즉위후 도성밖으로 옮겨지고 정동은 그당시의 이름만 남겨진셈

 

중명전은 정동극장과 예원학교 사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나오는데..

* 모든 이미지는 클릭하면 크게볼수 있습니다

 

중명전은 원래 경운궁(덕수궁)내에 있던 곳으로 중명전(重明殿)의 의미는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란 뜻

1897년경 을미사변이후 위협을 감지해서 아관파천을 단행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일신을 옮기고 정사를 보던 고종은 여론의 요구로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오면서 상황에는 맞지않지만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즉위식을 올렸고 중명전은 이무렵에 세워진 건물로 대한제국의 황실 도서관용도로 만들어진 건물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으로 1904년 경운궁(덕수궁)이 불타면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중명전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곳에서는 1905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적인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치욕스런 장소이고 고종은 퇴위의 빌미가된 헤이그 밀사를 파견한 곳으로 1907년 강압에의해 순종에게 자리를 넘겨줄때까지 국사를 처리하던 장소.

 

 

중명전 설명 내용

중명전과 예원학교 일대는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에 경운궁(현 덕수궁)을 확장할 때에 궁궐로 편입되었다. 경운궁 본궁과 이 일대 사이에 이미 미국 공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별궁과 같이 사용했다. 중명전은 왕실 도서관으로 지은 2층 벽돌 건물이며, 정관헌과 독립문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설계했다.

중명전 외에도 환벽정을 비롯한 10여 채의 전각들이 있었으나, 1920년대에 이 일대가 덕수궁에서 제외되면서 다른 건물들은 없어졌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비운의 현장인 동시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중명전 바로앞에서 한컷.. 매주 월요일은 휴무

마침 찾아갔던 5월5일이 어린이날이라 국경일인데 배재학당이나 심슨기념관등 모두 휴무일이라 난감했던차에 주목적지였던 이곳은 다행스레 개관중.. 중명전은 매주 월요일과 추석 설날 당일에만 개관을 안하며 10시부터 17시까지 개장

중명전 관람안내 - http://www.nationaltrustkorea.org/ourworks/joongmyeong.asp

 

중명전 가는길 동영상

 

당시 우리나라에 많은 건축물을 남긴 사바찐 - 동영상

 

중명전을 건축한 사바찐

러시아 태생으로 1883년 한국으로 건나와 1904년 러일전쟁 발발때까지 활동

사바찐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도

 

중명전 바닥 - 지금은 보호를 위해 유리를 깔아놓음

 

사바찐이 설계한 건물

경운궁의 고종이 커피를 마시던 곳 정관헌과 돈덕전 러시아 공사관 제물포 구락부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손탁호텔

 

 중명전 궐역에는 경효전 만희당 장기당 양복당 수풍당 정이당 흠문각 강태실 환벽정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짐

경운궁(덕수궁)은 원래 지금 서울역사박물관 자리에 있던 경희궁과 지척거리

 

이후 이곳은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서울 구락부)으로 쓰이다 1925년 화재로 전소되었었고 박정희 정권은 1963년 영친왕과 이방자여사에게 기증... 알려진 것으로는 부채때문에 매각이 되었다고합니다. 이후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2010년에 복원이 완료된곳

 

중명전 연혁

 

을사늑약

우리 근대사의 치욕과 반성을 그대로 느껴볼수 있는 장소로 이곳에 가면 당시 정황을 설명해놓은 안내와 당시 고종의 어새와 을사늑약 문서와 헤이그 특사의 여러가지 외교적 노력의 흔적을 볼수있는 곳

어릴때 을사조약이라 배웠는데 을사늑약으로 이름을 바꾸게된건 우리가 익히아는 안중근 의사에게 죽은 이토 히로부미가 당시의 고종황제를 협박했지만 먹히지 않았고 이후 작전을 바꾸어 무력을 앞세워 대신들을 협박했고 참정대신 한규설이 반대하였지만 역시 역사시간에 많이 배운 이완용을 필두로한 을사오적의 찬성을 가지고 강제로 체결

이완용은 어릴땐 아주 사악한 기회주의자로만 알고있었는데 실제로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출세가 가장 빨랐고 어릴때부터 영재였는데 원래는 고종이 아끼던 대신중에 한명.. 당시의 정세도 문제였지만 한국가의 고관대작이라는 이런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부류라는걸 다시금 되새겨봄..지식만큼 아니 그이상 더 중요한 인성의 덕목을 생각하게되는데..아무리 나라가 망해간다하더라도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성리학 국가에서 과거급제한 대신이 보여준 행위라는게 더욱 씁쓸..

이미 한반도를 장악한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서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 을사늑약을 강요

 

을사늑약 이전에 체결된 한일의정서 - 1904년2.23

당시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막강한 러시아 발틱함대를 물리치는등 승리를 거둔 일본

이후 미국과 가츠라 태프트 밀약을 맺은후 일사천리로 을사늑약 체결

 

 관련글 보기

2015/05/03 - [한국사 놀이터/근대] -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망국을 길을 가게되는 대한제국

 

 

 

제1차 한일협약 - 1904.8.22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심하게 내정간섭을 하기위한 수단으로 체결.. 시기상으로 가쓰라 태프트 밀약 직후..

당시 외부대신 서리인 윤치호의 인장을 볼수있는데 이후 을사늑약이 체결된이후 공개적으로 반대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윤치호는 나중에 친일을 하게되고 친일 인명 사전에도 등록이 되어있는 인물로 당시 우리 사회의 인간면모를 보여주는 인물

학식이나 인맥으로보면 독립운동에 뛰어들수도 있었지만 회의적이었고 그의 인생이 꼬인지점이 서자라는 출신상(조선시대) 한계와 갑신정변 이후의 젊은시절 도피생활이 형성되게 했었겠지만 말년의 적극적이진 않았다 하더라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도 친일 행각을 할수밖에 없던 상황을 미리 모면하지 않았던 점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 인물

 

 을사늑약 일지

1905년 10월 27일 일본은 조선반도를 지배하기위해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모두 승리를 거둔후에 자기들 말을 안듣는 조선 조정을 압박하고 다른나라와의 영향을 없애기위해 을사늑약을 강행 서울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1개사단병력 지원

11월 10일 나중에 초대통감으로 오게되는 이토히로부미는 중명전에서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일본 천황 친서 전달

11월15일 이토는 다시 고종을 알현하고 보호조약 체결을 끈질기에 요구했으나 고종은 끝내 거절 사극에서 보듯 아마 속으로는 나중에 하늘에서 선대왕들을 어떻게 뵐지 걱정했을수도...

 

11월 16일 하야시 주한 일본공사가 외부대신 박제순을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체결 강요 이후 한규설 이완용등 대신들을 불러 체결 강요

11월 17일 하야시 일본공사가 한국 대신들과 입궐 고종 알현을 요청했지만 거절 처음에는 고종과 대신들이 요구 거절 결정

하야시 공사는 이토히로부미에게 입궐 요청했고 하세가와와 함께 무장한 일본군을 대동하고 도착 참정대신 한규설은 계속 거절하다 갇힘 이후 새벽 1시경 이른바 을사오적인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의 동의를 얻어 강제로 체결 이들은 나중에 일본의 작위까지 받으며 호의호식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는 끝까지 거절

 

을사오적은 이후 암살의 위협등을 받기는 했지만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으면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고 이완용은 여러가지 곡절을 겪기도 했고 현재 과천동물원앞에 동상이 세워지기도한 이재명의사의 암살기도에도 당시 국내에 들어와있던 일본인 의사에게 최고의 수술을 받으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고 권력을 누리다 사망.. 이후 이완용이 주목 받은건 후손들 때문인데 해방이후 도망치다시피 해외로 이민을 했는데 이후 토지반환 소송으로 패소하기도하고 승소하기도하면서 금전적으로 챙겨가 많은 논란이 되기도.. 해방이후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것이 현재 현대사의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요소가 되기도 하는데 이유는 당시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가장의 부재로 제대로된 교육을 못받았고 감시까지 받으면서 후일 제대로된 직업을 가지지 못해 어렵게 살기도해 많은 대조를 이루기 때문..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들에게 대우를 제대로 해준것이 없음은 물론이고 이에 덧붙여 상대적 박탈감까지 느끼게 해준 현실..

 

을사 늑약 당시의 외교문서

 

정치와 외교가 왜 중요한지 알수있는 대목으로 제국주의 시대이던 당시에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제관계에서 나약한 조선의 편에선 정의의사도(?)는 어디에도 없었고 오히려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어려울때 도와주겠다던 미국은 제일먼저 국교단절을 하며 뒤통수까지 얻어맞던 시절로 외교는 전략도 매우 중요하지만 결론적으로 국력순이라는것을 다시금 상기시켜야할때..

 

 

을사 늑약이 무효인 이유는 군대를 동원한 강제성을 가지고 있었고 고종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을뿐더러 조약 체결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고 조약문 형식도 갖추어지지 않은데다 당시 백성들의 지지도 없던상황

 

2편 내용은 헤이그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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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래 중명전도 덕수궁 내에 있었는데, 덕수궁 땅과 건물들을 이리저리 빼앗겨서 현재처럼 작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덕수궁에서 멀지 않으니까 나중에 한 번 가봐야겠어요.
    • 현재위치는 덕수궁 옆에있는 정동극장 옆길 바로 뒤에 있습니다
      도보로 몇분만 가시면 되세요..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인데요 덕수궁은 일제가 고종을 강제 폐위시킨후 태황제가된 고종의 궁호를 덕수로 정하면서 명칭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비운의 역사네요..

      중명전도 원래 궐내에 있던 건물이었는데 일제에의해 많이 헐리고 팔렸다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