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높은 정신세계를 펼쳐보인 추사 김정희 세한도 - 국보 180호

Posted by 놀이터 추억보관소
2018.09.22 16:30 문화와예술/역사 화가와 그림

추사 김정희의 아주 유명한 그림인 세한도를 보면 의외로 어떻게 이런 그림이 국보씩이나? 하는 의문이 들수 있습니다. 세세히 뜯어보면 가운데 배치된 집은 엉성한건 둘째치고 원근법에도 어긋나는데 아무리 원근법이 서양화 기법이라해도 상식적인 실물 관찰만으로도 나올수 없는 형태입니다. 집안을 들여다볼 입구도 둥그렇고 방향도 원근법 무시된 집이 그려진 방향과 또한 반대입니다. 형태로보면 엉터리...


세한도 그림부분


매우 세심하고 까다로운 금강안을 가졌다는 김정희인데다 이미 청대에 서양화기법의 그림들이 중국에 존재했기에 당대에 청나라에서도 유명했던 김정희가 이런 형태의 회화들을 못보았을리 없습니다. 어릴때부터 천재소리 들었었고 중국에서도 비범함을 인정받은 젊은시절 청나라 최고의 컬렉터라 할수있는 옹방강의 보물창고인 석묵서루에서 하나하나 뜯어보던 그였기에...

세상에 없는 형태의 집에 나무 네그루 덩그러니있는 휑한 풍경이지만 소나무와 잣나무는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서있는것 같습니다. 잣나무는 이상적을 소나무는 완당 김정희를 의미하는걸로 해석하기도합니다.


국보 180호 세한도 - 1844년



1. 비상식적인 그림

서양화가 피카소를 떠올리면 아이들 그림처럼 그렸기에 실력이 딸리는걸 만회하기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카소의 어릴때 그림들은 정밀하고 세세하게 묘사된 수준급의 그림이었고 유명해진 이후에는 많은 논란속에서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그대로 그려내어 딴지걸며 의심하던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린적도 있습니다. 

자기세계를 가진 대가에대한 유치한 말장난처럼 김정희도 이런정도의 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죽기 얼마전인 71세에 쓴 봉은사의 판전글씨만 하더라도 본인이 가진 기량이 전혀 줄어들어있지 않습니다. 진경산수화를 그린 겸재 정선이 칠십대와 팔십이 넘은 노구에도 명작들을 그려낸것을 보면 나이와 무관하게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할수있겠습니다.


우리나라는 많은 전란으로 회화의 형태로 남아있는건 고려시대의것도 거의 남아있지 않을정도로 적습니다. 그렇다면 그시대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맞지않습니다. 일본으로 많이 건너간 고려불화만 보더라도 아주 높은 수준의 회화를 증명하고있습니다. 다만 남은게 거의없을뿐...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크게 남아있는건 많지않고 현재는 조선 중기이후의 작품들이 대부분이라고 할수있습니다.



2. 동양화는 왜 수묵화를 선호했을까? 사대부와 화원


동양화 전통에서 채색을 더하지않는 수묵화가 많은건 소동파의 예찬에서부터라고합니다. 여기에는 은근하게 기예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그림은 김홍도같은 전문적인 화원들과 정선 강세황같은 사대부들이 남긴것인데 사실 화원들은 성리학 사회인 조선에서 사대부들이 한단계 낮춰보는 시선이 팽배했습니다. 

중인출신이지만 정조의 총애를 받던 김홍도는 지방수령으로 있었음에도 탄핵당했고 양반이었던 정선도 과거급제를 통하지 않았는데 진경산수화로 유명인사였고 영조의 눈에들어 그림을 가르쳤던 전력도 있었건만.. 의금부도사로 있을때는 한낱 잡기로 유명해진 사람이 중요부서에 앉았다는 상소를 받고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강세황은 벼슬길에 나서기전 영조는 그림 잘그리는 것으로 인해 혹시나 해를입지않을까 염려한다는것에 감격해 십여년간이나 절필하며 그림을 그리지 않은걸 보면 당대에 화가가 가지는 위치를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사대부들이 원하는 그림은 이상적인 세계에대한 동경을 담고있습니다. 현재와 비유해 기독교를 떠올리면 예수와 관련된 성화를 떠올리면 되는데 이런 그림에서 표현된 리얼리티보다는 본인의 상상속 상황의 극대화에 있다고 할수있습니다. 

결국 선비들이 꿈꾸던 주자학적 이상은 성인이 되는것이고 그를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던것입니다. 그래서 산수화는 주자가 거닐던 무이구곡도같은 이상향이나 소동파를 기리며 소상팔경도같은 동정호의 여러 풍경들을 주제로 그리는것을 볼수있습니다. 우리의 산하를 그린 조선후기의 진경산수화도 실제의 경치를 그린 실경산수화라기보다 개인적 느낌으로 실제와 다르게 그려지는데 여기에는 덧붙여 문사들의 싯구나 감상평등이 들어갔습니다.

소동파나 주자의 무이구곡도등 조선시대의 이러한 조류를 두고 모화사상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현재에서 결과론적으로 접근한것이고 당시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를 꿈꾼 것이라 할수있었습니다. 더구나 사대부들이 그린 문인화에서는 더더욱..



회화로만 조선시대를 관통하면 김정희의 세한도는 극단적으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가지고 사의(寫意)를 중시한 문인화의 최고경지를 볼수있습니다. 세한도를 그릴당시 김정희의 상황도 그렇고 그의 학식이나 인품에다 인고의 시간인 귀양살이와중에 별의별 인간적인 고뇌의 긴 시간속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이미 세속의 권력이나 영향력이 사라진 자신에게 변함없이 대해주는 이상적이 너무 고맙기도하겠고 현재의 상황은 계속 암담하고...

김정희 이후에는 장승업같이 일자무식이지만 기예가 매우 뛰어난 천재 화가가 나오게되고 조선말기에 들어서면 민화가 득세하면서 다채롭고 화사한 그림들이 쏟아지는 시기에 들어섭니다. 아마도 김정희가 봤다면 뭐라했을지 모르겠지만 고미술에 혜안을 가진 미술평론가 동주 이용희는 우리 옛그림은 됨됨이를 중요하게 봐야한다는 어딘가 애매하지만 따지고보면 적확한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의 기준은 기준대로 이해하고 지금시점에서는 어떤 것에 우세를 두기보다 자기세계의 완결성과 기예가 도달한 경지의 완벽한 조합이 더욱 중요하다고 볼수도...



추사 학예에 대한 평가



3. 세한도를 그리다

세한도를 그리게된 계기는 오랜 제주 귀양생활중에 연경의 진귀한 책들을 구해다준 우선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습니다. 이상적은 중인 역관 출신이지만 당대에 조선은 물론 청나라에서 문인으로 유명했습니다. 은송당집이라는 시문모음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김정희는 귀양살이중에도 동생에게 자기집 서가 어디어디에 꽃혀있는 무슨책을 보내달라고 서신에 적을 정도로 꼼꼼한 사람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기에 최신의 청나라 서적에 대한 갈망은 누구보다 강했을 추사였지만 제주도 끝자락에 위리안치라는 꼼짝못할 최고의 귀양살이중...

이미 권력과는 멀어진 사람이었기에 떼어놓을수 없을 가족과 친밀한 몇몇을 제외한다면 관련있던 사람중에 처세를 따지는 사람이라면 가까이하지 않았을 것으로 이런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텐데... 이상적은 청나라에서 어렵게 구한 서적들을 누구보다 반가워할 추사에게 수시로 보내주었습니다. 실력으로만 놓고보면 당대 최고 학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 그리고 그간의 의리였을것으로 추측하는데 끈떨어진 자신에게 이런 이상적이 너무나 고맙고 감격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이상적은 이런 귀한 서책들을 다른 목적을 가지고 처세에 활용할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신념대로 추사에게 보낸것입니다.



이상적이 김정희에게 보낸 책인 황조경세문편으로 연경에서 제주까지 많은 길을 돌아서 김정희의 손에 들어갔을때의 감격을 되새겨봅니다.

 

이상적



세한도 부분 제목 옆에 우선시상( 藕船是賞 우선 - 이상적의호 -  보시게) 그리고 본인을 말하는 소나무 잔가지위에 완당 낙인은 절묘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후대에 대가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의 그림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결된 것을 볼수있습니다. 아주 미묘한것까지도 세세한 위치까지 제자리에 들어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차이 같은데 전체를 놓고보면 이하나 때문에 많은것이 틀어질수도 있고 더욱 완벽해질수도 있습니다.

하단에는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 새겨진것으로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는 의미





연경에 수시로 가던 역관인 이상적은 세한도를 가지고 갔고 청나라에서 유명한 추사인지라 자연스럽게 같이 감상을 한후 발문을 받아 추사에게 다시 보여주었습니다. 16명의 발문이 붙은 세한도는 이렇게 길이가 십사미터까지 붙었습니다.


세한도는 일제강점기 민영익의 집에서 경매로 나왔는데 요즘말로하면 추사 덕후라 할수있는 후지츠카 치카시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갈때 가지고 갔는데 서예가이자 같은 추사 덕후였던 소전 전재형이 자신에게 되팔라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1944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이곳저곳 공습이 있었습니다. 청대 고증학 그리고 추사 연구가였던 후지츠카는 당연히 안팔겠다고 했는데 두달을 찾아가며 문안을 드렸더니 진심이 통해 이에 허락을 했고 소전은 그자리에서 백지수표를 건냈습니다. 하지만 후지츠카는 누구보다 아낄것으로 믿음이가고 세한도는 값을 매길수 없는것이라며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세한도는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습니다.



4. 세한도를 그린 모티브

짓다만듯 뭔가 어색한 형상의 집한채와 소나무 하나와 연이은 잣나무 그리고 옆으로 잣나무 두그루가 더있는 형상은 어디서 의미를 얻어 그리게 되었을까요?

우선 세한도라 명명한것은 논어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직접쓴 글에 있습니다.  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 

세한도의 모티브는 젊은시절 옹방강의 석묵서루에서 보게된 소동파의 언송도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유배생활중에 어린 아들이 찾아왔을때의 기쁨을 그린것인데 그림은 전하지 않습니다. 김정희가 본건 옹방강의 시구절로 고목이된 소나무가 비스듬히 나무가지 드리우고 집에 기대어있다는 감상이었습니다.

한편 세한도의 회화기법은 초묵법으로 제자인 소치 허련에게 배운것입니다. 허련은 여러번 제주 유배지의 스승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그때 알려준것으로 먹의 농도를 조절하지않고 붓의 눌려진 농도만으로 명암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그리는 것인데 추사 붓놀림의 경지를 볼수있는 그림이기도합니다. 문인화이기에 기예를 높이치지 않았을뿐 그의 경지는 정점이라할만큼 높은 것을 볼수있습니다.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지난 해(1843, 헌종9)에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부쳐주었고, 금년에 또 우경(藕畊)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세상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입수한 것이지, 한 때에 해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도도한 풍조는 오로지 권세가와 재력가만을 붙좇는 것이다.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소비하였는데, 이것을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갖다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 하고 있는 나에게 마치 세인들이 권세가와 재력가에게 붙좇듯이 안겨주었다.


 사마천(司馬遷)이,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 하였다. 그대 역시 세속의 거센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권세가와 재력가를 붙좇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孔子)께서, “일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셨다. 소나무 ·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 존재이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 · 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 없는 소나무 · 잣나무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아! 전한(前漢)의 순박한 시대에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도 그 빈객들이 그들의 부침(浮沈)에 따라 붙좇고 돌아섰다. 그러고 보면 하규(下邽) 땅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榜)을 써 붙여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풍자한 처사 따위는 박절한 인심의 극치라 하겠다. 슬프다!



출처 - http://www.itkc.or.kr/bbs/boardView.do?id=75&bIdx=31460&page=1&menuId=126&bc=0



세상 살면서 어려운 시기에 이런 진심어린 친교를 나눌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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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이상적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

그외의 이미지 - 과천 추사박물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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