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문인이자 최고의 학자였던 예술가 - 생애

Posted by 놀이터 추억보관소
2018.09.16 09:54 한국사 놀이터/조선시대

흔하게 추사체의 창시자로 생각하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일반적으로 깊이 알아보지 않았다면 추사 김정희는 한석봉처럼 글씨 잘쓰고 단원 김홍도처럼 그림 잘그리는 예술가로서 인지하는 경우가 꽤많지만 실제로 그는 금석학의 대가로서 지금기준으로 보면 (당시 성리학적 전통이 많이 사라진 상태의 청나라까지 이름이 알려졌는데 아직 성리학적 기운이 많이 남아있던 조선에서온 학인들의 식견을 알아보고 대우해주었고 역으로 당시 청나라의 높은 문명 수준을 답답했던 조선에 접목시키려던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등 실용적이고 개혁적 성향의 북학파 학자들을 볼수있습니다)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인문학자로 이야기할수 있습니다. 


추사의 애제자 소치 허련이 그린 김정희



그림에 관해서 추사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의 특징인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書卷氣)가 있는걸 우선으로 쳤기에 기교나 기예보다는 의미에 더욱 방점을두고 많은 내적 깊이와 감성적 정취에의해 나온 것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이를 비껴간 것들에 대해서는 깐깐하게 한성격하던 추사는 날선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읽은 유홍준의 추사 김정희는 작품의 고증에 대해 논란이 일고는 있지만 김정희의 생애를 평전형식으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홍준의 능력 가운데 하나라고 보이는부분은 초심자에게도 해당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하는 필력에 있습니다. 물론 학자로서의 엄밀한 부분은 당연한 부분인데 아무래도 해당분야 비전문가가 논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논란들을 지켜보면서 수렴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것도 훌륭한 반면 교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추사 김정희는 1786년 충남 예산생으로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의 남편 부마 월성위의 후손인 김노경의 장자로 어릴때부터 대단한 붓글씨로 유명세를 치르기도했습니다. 입춘대길이라 쓰여진걸 지나가던 영의정 채제공과 정조의 총애를 받던 학자로 4검서중의 한명인 박제가가 들어와 누가 쓴것인지 물을정도였습니다. 둘다 누구집인지도 모르고 들어왔지만 정치적으로는 반대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은 붓을들면 천하에 이름을 알리겠지만 운명의 굴곡이 많을것이니 붓을 잡지말게 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럴리가 없었겠지요... 북학파의 대가였던 박제가는 재기발랄한 어린 김정희의 스승이 되고싶다고 하여 그의 스승이 됩니다.


홍대용 박지원과 같이 북학파였던 스승인 박제가와의 만남은 청나라 연경에 대한 꿈을꾸게해주었고 스물넷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자격으로 꿈에 그리던 연경을 가게됩니다. 이미 스승인 박제가의 소개로 연경에서도 인지도가 있었던 김정희는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사고전서를 편찬하는데 참여했던 금석학의 대가이자 당대를 대표하던 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과 청나라 최고의 학자중에 한명인 완원(阮元)을 극적으로 만나게되고 스승으로 모시게됩니다. 추사와 더불어 가장 많이 쓰이는 완당(阮堂)이라는 호는 완원을 기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0대의 김정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옹방강과 완원


앞서 말한것처럼 박제가는 연경에 김정희의 이야기를 많이 해두었고 실제로 만나본 이들은 김정희의 출중함과 비범함에 놀라게됩니다. 당시 청나라를 조선에서는 오랑캐의 나라로 애써 평가절하했지만 국력이 절정기로 접어들었던 시절로 세계의 중심이기도했습니다.

강희제와 옹정제시기의 탄탄한 기반을 물려받은 건륭제는 사고전서 작업을 진행하는등 문화적인 면에서도 집대성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역동적인 시기에 약관을 넘긴지 얼마안된 젊은 나이로 방문했던 김정희는 평생 잊지못할 스승과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김정희가 천재로 불릴정도의 가지고 있었던 비범함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영향만을 받은게 아니라 나중에는 이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끼치고 이들에게는 변방인 조선이라는 국적을 떠나 학자로서 많은 존경을 받습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정희는 조선시대 가장 아까운 세자중에 한명인 효명세자의 스승이 되기도했는데 후일 이것은 정치적인 화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벼슬길에 나아가 승승장구했지만 효명세자 사후에 대척점을 이루던 안동김씨 세도가 집안의 김우명과 어사시절 있었던 악연으로 기나긴 유배생활을 합니다. 더구나 이때는 동지사로 임명되어 꿈에 그리던 연경에 삼십여년만에 가게될 예정이었지만 귀양길을 가게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합니다.


추사체의 완성은 재능은 뛰어나지만 까탈스럽고 기고만장하던 그의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기나긴 유배생활이 가져다준 철저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나온것이라 볼수있습니다. 위리안치라는 지금으로치면 가택연금 형태에다 머나먼 제주로 간것이기에 중간중간 찾아오는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보냈을 것이기에 완성되었다고 볼수있습니다.







조선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김정희는 평생지기인 초의선사와 교류 그리고 다산 정약용에게 귀한 수선화를 보내는등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림에 관련해서 조희룡 허련 흥선대원군 이하응등에게 직접적인 영향과 가르침을 주기도 했는데 심의를 중시한 남종문인화의 영향으로 기예를 높이치지 않았습니다. 조희룡은 매우 뛰어난 화가이지만 김정희의 영향과 비판속에서 성장을 하기도했고 허련은 애제자로 추사가 원하는 것을 화폭에 담아내곤했습니다. 난초로 유명한 흥선대원군은 김정희가 압록강 이남에서 최고의 실력이라는 소리를 할정도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김정희의 본모습 가운데하나는 역사학자로서 금석문의 해석에 있는데 초의선사와 더불어 평생지기였던 권돈인과 신위 조인영등과 금석학을 청나라에서도 인정받을 정도의 금석학을 발전시킨데 있습니다. 대부분이 무학대사의 비라고 알고있던 북한산 순수비를 진흥왕이 세운것을 밝힌것이 가장 큰 업적이라고 볼수있습니다. 


추사는 오랜 유배생활뒤에 말년을 과천에 있는 과지초당에서 지내면서 가까운 봉은사에 자주갔습니다. 봉은사 판전 글씨는 추사의 최후작품입니다. 이러한 추사의 재발견은 일본의 동양철학자인 후지츠카에의해서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에 있었던 그는 청나라 금석학을 연구하다 당대기록에 계속적으로 언급되는 추사 김정희의 자료를 모으며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후지츠카는 당시 인사동에서 추사에 관련된 엄청난 자료들을 모두 구입했습니다. 그중에는 유명한 세한도도 있었습니다.


코엑스뒤에 있는 봉은사에가면 판전이라고 쓰여진 곳을 볼수있습니다. 글씨가 특이해 알아보니 추사체였던 기억이 납니다. 추사 김정희가 71세 쓴글씨로 최후의 작품으로 알려졌습니다.





후지츠카는 후일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추사관련 자료들을 모두 우리나라에 기증했고 현재 과천 추사박물관에서 전시하고있습니다.

다음글은 추사박물관과 세한도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포스팅하겠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상적인 인물이던 소동파의 자세에 김정희의 모습으로 그린 전신초상으로 추사가 소치를 아끼는 이유를 알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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