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 관람시작 부용지 부용정 주합루 어수문 영화당 - 조선고적도보에 나온 사진 비교

Posted by 놀이터 추억보관소
2017.10.18 05:10 역사유적 방문/고궁

창덕궁 후원은 일제시대이후 비원으로 격하되어 불리며 이후 한참동안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창덕궁 낙선재에서는 조선시대 왕족들을 경계하던 이승만에게 쫓겨나기도 했지만 하야이후 다시들어와 살던 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가 있고 그리고 1980년대까지 덕혜옹주와 영친왕비 이방자여사가 살았습니다. 


후원관람시에는 현재 해설사를 동반해 일정한 시간에 출발해 동시에 끝나는 형태로 관람이 가능합니다. 후원입구에서 시작해 처음 도착하는 곳은 부용지로 부용루와 어수문 주합루 뚫려있지만 원래는 담장이 둘러있었던 영화루를 볼수있습니다. 조선시대였다면 물론 중간에 문이있기는 하지만 공간이 분리된 것을 볼수 있습니다. 부용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화루 담장에 있던 문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했던것을 알수있습니다.


창덕궁 후원에서 처음 맞이해주는 것은 부용지로 부용정 주합루 어수문 영화당 건물을 볼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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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가는길 부용지 가기전에(부용정과 술성지 후원입구방향으로 뒷편)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열고관과 개유와 현재는 없습니다. 열고관은 정조대에 만들어졌고 중국에서 들여온 서적을 보관하기위한 용도의 건물입니다. 정조의 학구열을 엿볼수 있는 건축물입니다.

조선고적도보에서 볼수있는 열고관 이때 사진이 있는것을 보면 1930년대까지는 존재했었는데 이후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명확한것이 없습니다. 열고관은 습한기운이 있어 서책은 바로 남쪽에 있던 서고에 보관.. 현재는 모두 사라진 상태.. 옆으로는 왕실도서관인 봉모당이 있었습니다. 열고관에는 중국책 2만권 서고에는 우리나라도서 1만권을 보관했다고합니다. 19세기초 창덕궁에는 전체 10만여권의 장서가 있었다고합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해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관리중입니다. 현재는 규장각 도서로 불리고 있습니다. 봉모당에 있던 것들은 창경궁 장서각으로 옮겨졌고 한국한중앙연구원에서 관리하며 장서각 도서로 불립니다. 봉모당 자료는 흥선대원군이 옮겼고 궐내각사쪽에 복원되었습니다.




부용지와 맞닿은 부용정 동궐도에 보면 배를 띄운것으로 보아 뱃놀이를 했고 정조때에는 부용지 가운데 섬으로 유배를 보내는 장난을 하기도 했다합니다. 군신간에 격의없는 술자리와 연회가 베풀어 지던곳.. 부용지는 네모형태로 땅을 의미하고 가운데 섬은 원형으로 하늘을 의미합니다.


연산군때에 서총대앞으로 못을 꾸미면서 조성되었고 숙종때 대대적으로 수축... 부용지라는 이름은 정조때 대대적으로 다시 정비하면서 부용정이라를 정자를 지으면서이고 동궐도에 부용지를 보면 배가 두척있는데 한척은 놀이용으로 앞머리에 용이 조각되어있고 중간에 정자가 있습니다. 작은배는 관리용으로 추측..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부용정


현재의 부용정과 뒤에 보이는 비각은 사정기 비각(술성각)으로 세조가 부근에 네군데 우물을 팠던것을 기념해 숙종대에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세운것입니다.

부용정을 보면 동궐도등 그림을 참고해 20세기들어 보이지 않았던 지붕위 용마루가 교차하는 부분에 절병통과 용마루끝 취두를 2013년에 복원했습니다.




어수문과 주합루 설명

주합루는 정조원년(1776년)에 창건된 2층의 누각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 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 작은 어수문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조선 고적도보에 실린 주합루와 어수문


주합루와 어수문


어수문은 임금만 다닐수 있는 통로입니다. 신하들은 옆에있는 문으로 출입했습니다. 좌우로 취병 조경기법으로 세워진 울타리를 볼수있습니다. 전체를 가린 것이 아닌 보일듯 말듯 반만 가린 우리 선조들의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선고적보도에 실린 주합루

순종때 이토 히로부미등을 불러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향각이 누에를 치는곳으로 변모하는 수모를 당하기도했습니다.


주합루옆에있는 서향각




2014년 1월 주합루

주합루는 정조때 규장각을 지으면서 2층은 주합루라 했습니다. 왼편 서향각은 책을 말리는 공간으로 서재용도로 쓰였습니다. 주합루는 1층은 규장각이라 칭했고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왕권의 위엄을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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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합루 앞쪽에는 취병이라는 조선시대 조경기법으로 울타리를 재현했습니다. 취병은 담의 기능을 하는 동시에 자연그대로 아늑하게 꾸며진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건축기법등을 보면 자연을 그대로 살리는 방법을 많이 취했는데 왕의 궁궐인 창덕궁까지 자연적인 요소에 기대어 작위적인것을 최소화한 미덕을 볼수 있습니다.





영조의 글씨인 영화당 현판.  영조가 직접 썼다고합니다.


조선 고적도보에 실린 영화당 이때에도 이미 담장이 허물어져 뒷편으로 부용정이 보입니다.



영화당은 앞에있는 춘당대에서 벌어지던 무과시험이 있을때 장전(큰천막)을 치고 행사를 지켜보고 합격을 축하해주던 곳으로 숙종때 건물을 짓고 영화당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행사가 많았던 곳으로 큰행사가 있을때는 차일을치고 수백명이 올라갈수 있는 보계를 설치해 행사를 치뤘다고 합니다.

영화당은 전면은 다섯칸 측면에서 보면 세칸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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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 부용지와부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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