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유적지] 사세충렬문과 김여물 장군묘

Posted by 놀이터 추억보관소
2016.07.03 01:31 안산이야기/유적지와 여행

안산에 있는 향토 유적지 가운데 와동에 가면 광덕산 자락에 사세충렬문과 김여물 장군묘가 있습니다. 

김여물 장군은 신립과 함께 임진왜란당시 탄금대에서 전사한 장수입니다. 김여물은 원래 신립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류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의주목사로 재직하다 물러났고 진치는 훈련이 명나라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명목이지만 실제로는 당파싸움이 심하던 시절 정철의 서인이라는 이유로 수감중.. 임진왜란 발발후 지나가던 신립이 그를 보게되었고 요청으로 합류하게되었습니다. 당시 김여물은 그리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고합니다.

김여물은 탄금대 전투당시 문경 새재의 길목을 지키자는 의견을 내세웠지만 이곳을 지나던 고니시 유키나카는 천혜의 요새라면서 조선의 장수를 비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데 사실여부는 알수없지만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대목이긴합니다. 신립은 기마병을 앞세운 탄금대에서의 전투를 선택했고 이후에도 패색이 짙자 중앙에서의 후일을 도모하며 후퇴를 권했지만 끝내 김여물은 신립과 함께 최후를 맞이합니다.


김여물의 아들은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류로 후일 영의정까지 지내게되고 그의 아들인 김경징은 할아버지 김여물과 다르게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를 지켜내지 못했는데 강이 얼어 청군이 넘어오지 못할거란 무사안일에 빠져 술마시고 놀며 느슨하게 방비하다 함락되었고 이곳에있던 왕자와 왕족들이 붙잡히게되어 결국 인조가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후일 공신 김류의 아들이라 귀양으로 마무리하려다 빗발치는 상소로인해 결국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강직한 충신의 손자인데 행동이 정반대인걸보면...

강화도가 점령당할 당시 김여물의 후실인 평산신씨 며느리 진주유씨 손자며느리 고령박씨 증손자 며느리 진주정씨가 오랑캐에 욕을 당하느니 강화도 앞바다에 몸을 던졌고 후일 이를 기려 조정에서 하사한 것이 사세충렬문입니다. 당시 김경징이 강화도에 있었고 이곳에는 대가집 부인들이 많이 피난을 가있었고 강화도는 몽고의 침입당시에도 버티던 곳이었고 인조도 이곳으로 피난을 갈 생각이었지만 함락되어 들어가지 못한곳입니다. 잘 아는것처럼 결국 인조는 항복을 하게됩니다.


사세충렬문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호

소재지 : 안산시 단원구 와동 151번지

시대 : 조선중기




사세 충렬문 및 김여물 김류 신도비







사세 충렬문 정문 닫혀져있어 안에는 못봤습니다.




사세충렬문


이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장군과 함께 왜적을 막아내다 전사한 장의공 김여물의 애국충정과, 병자호란때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김여물의 후실 평산 신씨 김여물의 아들 김류의 처 진주 류씨 김여물의 손자 김경징의 처 고령 박씨 김여물의 증손자 김진표의 처 진주 정씨의 절개를 기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내려준 정문이다. 현재 건물안은 2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오늘쪽 칸에는 김여물의 충신 정문이 있고, 왼쪽 칸에 4대 열녀의 정문이 있다. 현재 건물은 1979년에 중수한 것이며, 1983년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면서 다시 건물을 보수하였다.




병자호란때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자 이때 오랑케에 욕을 당하느니 죽는 편이 옳다하여 강화도 앞바다에 몸을 던진 김여물의 후실인 평산신씨, 며느리 진주유씨, 손자며느리 고령 박씨, 증손자 며느리 진주정씨의 이 같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하사한 정문이다.


병자호란 때 한양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조정 에서는 대가집 부인들을 강화도에 피난케 하고 이어 인조임금께서도 여러 신하들과 같이 강화도로 피난하려고 하였으나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남한 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벌였는데 강화도가 적군에 함락되어 왕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적의 인질이 되었다는 비보를 들으시고 1637년 1월 30일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오랑캐가 강화도에 상륙하자 많은 사대부(士大夫 : 문 무(文武) 양반의 일반적인 총칭)집 부인들은 포로가 되어 오랑캐에게 갖은 만행을 당하였다. 이때 오랑캐에 욕을 당하느니 죽는편이 옳다하여 강화도 앞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殉節 : 정절을 지키어 죽음) 함으로써 적군에게 욕을 면한 사세고부(四世姑婦,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바로 임진왜란때 신립장군과 같이 최후까지 적을 무찌르다 순직한 김여물의 후실인 평산신씨, 며느리 진주유씨, 손자 며느리 고령박씨, 증손자며느리 진주정씨이다.


사세열녀(四世烈女)의 이같은 정신은 바로 장의공 김여물(長毅公 金汝 )이 임진왜란 당시 애국 충정의 발로로 달천강(충주, 忠州)물에 투신 자살한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후 조정에서는 한 충신의 애국충성과 4대에 걸친 고부(姑婦)의 열녀정신을 죽음으로써 지킨 것을 길이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하사한 정문(旌門 :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의 집 앞에 세운 붉은 문)이다.


사세충열문(四世忠烈門)은 도리간(정면간)이 3칸, 양간(측면간)이 2칸인 목조건물로 4각기둥의 주심포양식(柱心包樣式 : 기둥머리 위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하여 떠받친 양식) 팔작지붕(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 지은 집모양) 이다. 건물 입구에는 사세충열문이라고 쓴 목판이 걸려있고 건물안은 2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우측방은 마루바닥으로 안쪽벽은 액자가 두개 걸려있고 좌측방은 맨바닥으로 벽의 중간지점에 안쪽으로부터 좌로 돌아가며 사세열녀 (四世烈女)들의 이름을 써 놓았다. 건물 주위로는 1.6m 높이의 담장이 둘러져 있다.


내용출처 - 안산시청 

http://www.iansan.net/ansan/event/CultureDoSase.jsp?menuId=01003043#culdo


사세충렬문 뒤쪽으로 2-3분 올라가면 김여물 장군묘와 앞쪽에 증손자 김진표의 묘가 있습니다. 



김여물 장군묘 영상






김여물 장군묘 묘 주변으로 문인석과 망주석 그리고 동자석이 세워져있습니다. 묘비석이 2개이고 상석과 향로석이 있습니다.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4호

소재지 : 안산시 단원구 와동 141번지

시대 : 묘 - 선조25년 (1592), 신도비 - 현종3년 (1662)

규모 : 봉 분 - 126×350cm, 신도비 - 15.8×74×26cm



김여물장군묘 안내


조선시대의 충신. 자(字)는 사수(士秀), 호(號)는 피구자(披 子),외암(畏菴), 본관은 순천(順天),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훈(壎)의 아들이며 영의정(領議政) 류( )의 부친이다. 현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 소재한 김여물의 신도비(神道碑)에는,「무릇 충신(忠臣)·열사(烈士)가 나라를 섬김은 국난(國亂)을 당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는 데 있다. 하늘의 명 또한 위훈(偉勳)과 환업(煥業)으로써 그 자손을 반드시 창성하게 하니, 이것은 마치 상하가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보답하는 것과 같다.


이와같은 이치는 크게 밝아 조그마한 착오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군자는 이로써 천리(天理)가 없다고 탄식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라는 글귀로 시작 그의 대인(大人)으로서 의 공평무사한 행적과 애국의 단성(丹誠)이 새겨 있는데, 이 신도비는 김상헌(金尙憲)이 찬(撰)한 것이다. 김여물은 어렸을 때부터 병서(兵書)에 밝아 20세(1567)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30세에 대과(大科)에 합격하였다. 호조(戶曹)·예조(禮曺)·병조(兵曹) 등의 좌랑 (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전되고 충주군사(忠州郡事)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24년(1591)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당(黨)으로 몰려 파직 투옥되었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왕의 특명으로 충주(忠州)의 방어를 나섰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새재의 고수를 주장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았고 마침내 왜적에게 새재를 내주고 말았다. 또 불리하면 중앙으로 가서 한양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립은 또 듣지 아니하였으니, 김여물은 미리 패할 것을 알았다.


우리 군사가 패하자 신립이 김여물에게 묻기를, "공은 살기를 원하오" 하니 김여물은 웃으면서 "내 어찌 죽음을 아끼리오" 하고, 함께 탄금대(彈琴臺) 아래 이르러 적 수십 명을 맨손으로 죽이고 물에 투신하였으니 이때 공의 나이 45세였다. 이듬해 의관을 거두어 안산(安山) 동장리(洞長里)에 장사지내고 정려를 세웠다.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의(壯毅)이다.


내용출처 - 안산시청

http://www.iansan.net/ansan/event/CultureRuralKim.jsp?menuId=01003043


두개의 비석 하나는 후대에 세워진것을보면 의주목사 순천김공 여물지묘라 쓰여진것을 볼 수 있습니다. 후일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기에 이부분도 표기가되어있습니다.


뒷부분


먼저 세워진 묘비석 뒷면 숭정5년 임신 3월이라고 세워진 일시가 쓰여져있습니다


주변의 석물들




사세충렬문옆으로 가면 신도비가 있습니다. 김여물과 그의 아들 김류의 신도비입니다



1622년(현종 3년)에 경기도 안산시 와동에 건립된 김여물(金汝岉)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김상헌(金尙憲)이고 서자는 김좌명(金佐明)이며 제액(題額)은 이정영(李正英)이 전서(篆書)로 썼다. 


김여물 장군 신도비 내용보기 - 한국 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원문

金汝岉神道碑 金汝岉 神道碑 有明朝鮮國 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順昌 府院君行通政大夫義州牧使義州鎭兵馬節制使金公神道碑銘并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傳 金尙憲 撰 嘉義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 經筵參賛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同知成均館事 金佐明 書 嘉善大夫漢城府右尹兼同知義禁府事 李正英 篆 盖忠臣烈士之事國也遇難則以身殉之而成其仁天之命之也亦必以巍勳煥業昌大其子孫上下若交相報然厥理孔昭靡或差貳是以感 慨無天之 論君子不恣談焉萬歷壬辰歲我 昭敬王當國日本逆酋秀吉動大兵謀犯 天朝聲言假道不日至鳥嶺國事危急故義州牧使金公從巡 邊使申砬 禦之于忠州兵敗死之 國家如失長城士民聞之莫不哀痛後三十年癸亥奸臣縱臾幽辱 母后芟荑骨肉人怨神怒國幾殄&A5484;于時公之 子文忠公 瑬率忠義之士翊戴我 主上再正彛倫救生民於塗炭 社稷是賴於是策勳一等推 恩三代 贈公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A2587;監事 世子師順昌府院君天人之際可謂兩盡矣謹按公順天人諱汝岉字士秀七 世祖承霔 事我 恭定大王有功封平陽府院君初名乙寶遇早命&A5485;&A5485;輒㴻應嘉其誠褒 賜今名傳至繕工監正元石是公高祖曾祖諱若鈞繕工監 正祖諱粹 濂通政定州牧使 贈兵曹判書考諱壎省峴道察訪 贈議政府左賛成蓄德不施以胎其後娶信川康氏府使顗之女嘉靖戊申十二月生 公少英特 學書善博士家言先世固武胤尤曉暢司馬法多力便弓馬母康夫人服訓儒門義方嶄然公益勵秇業二十擧進士三十魁大科手神俊采映 帶數人出 入爭目屬之次第一時豪傑無有能先公者公亦自負以爲一時豪傑不己若田戶禮兵三曹佐郎陞正郎拜司諫院正言未久連拜江原京畿 二道都事 還爲兵曹 上御東苑閱武聞公善射 命試之公辭指眚免試又出爲忠凊道都事公望甚欝一不以旃厦尺寸地借公輿議歸譏於時思庵朴相公淳 知公有國士風心重之適道其界引公相見設賔主禮相公素名知人眷許可門下客未嘗有以押進被其容接如登龍然是日觀相公之待公 者無不竦 然變色始方伯慢公頗自倨時屏氣守屏竊聽於下風大慙悔貶謝遆歸選補安東縣監故嶺南劇府名爲材公而實擯之公痛一剪束豪民猾 吏惴惴負 霜雪以行不敢用其術爲支吾復入爲兵曹參玉堂錄拜獻納又以御史巡撫湖南適順天缺府使地重難得人 上問今日稱文武具者必以 金某爲首 欲除此人聞其有老母如何銓曺以資淺爲解盖淸議欲用公爲本曹郎而 上特子准級異數也乙酉遭內艱服除授潭陽府使大臣薦爲義 州牧使前 此居官者飭厨傳聲樂以娛賔客取名譽置邊&A2616;於度外公悉變舊獘噲然改觀事修謗興踰年罷歸壬辰春譯人往來 上國醉飽失言繫治 金吾辭連 逮公不悅者乘時媒孽事將不測會邊遽狎至 上下教此時金某可惜貰過責效體察使柳公成龍及申砬交請自佐 上命與砬公先在獄 語同繫者 曰廟議待賊登岸擊之此不知兵者也賊若登岸必不可當至忠州謂砬曰賊銳甚難與爭鋒宜固守鳥嶺不聽賊旣踰嶺又言先據高阜追擊 之不利入 衛京城又不聽乃背水以陣公知必敗爲書與子曰三道勤 王師無一人至者吾等奮臂無助男兒死國職爾但 國耻未雪壯志未成以是 負恨且戒 家人必赴 行在母爲迯難計賊衆號六十萬勢如狂濤一湧而進接刀攅砲星馳霆擊人不能正視砬蒼黃欲馳 秦視公屬草身擐甲胄臂 弓腰箭屹 然不動鳴毫颯颯卒書投筆無一字錯精彩倍於他日帳下觀者人人嘖嘖稱歎我軍寡弱居散地其心固己不牢鬪始合果皆奔潰公在軍中 不過一士 伍勢不能令砬字呼公曰君亦求免乎公笑曰豈以我惜死哉同至彈琴臺下手殺賊數十人相與赴水即壬辰四月二十八日也春秋四十五 明年癸巳 歛衣冠葬于安山洞長里新卜艮㘴坤向之原 朝廷㫌表門閭事載三綱錄忠臣傳中初 上命廟堂擧西南邊郡緩急儲胥者推宋公&A2587;賢 曁公以應 旨亡何難作宋公死東萊公死於此人始稱一時遴東之政大有光於國家云雖然寬則抑外之急則小試之又不行計畫卒未能究其用而收 其功亦何 補於濟亂乎公雖云歿世皆高仰忠烈相與流傳記載表顯永久其視向之妬賢害能之徒骨未杇而名堙滅者相去何如也公爲人倜儻好義 氣常有千 萬人吾往之志早孤事母夫人如嚴父或有誨責終日伏戶外不命不退俸入畢獻大夫人所一未嘗私焉喜施子重然諾不以死生卑賤爲間 友人有子 女夥而夫婦並歿者取其甚幼弱者子畜之與文忠公相長大人不知爲異姓也所與遊盡魁士徐義州益林龜城植最合二公皆有母每遇壽 節公奉之 如其大夫人二公之爲之也亦然公之焯德懿行不勝書大如此細可略也公於詞賦詩文兼善至於酬酢赤札亦無凡筆而耻以此自名故人 無得以稱 焉夫人朴氏咸陽名族縣監崗壽之女明淑孝義多傳爲女範後一䄵癸巳五月卒於江華其冬祔干公墓生一男曰瑬再以靖 社寧國元勳 封昇平府 院君兼大提學三爲領議政謚文忠配享 仁祖廟庭娵晋原府院君柳根女生一男曰慶徵文科靖 社功臣順興君漢城府判尹娶府使朴 孝誠女生 一男曰震標文科狀元前參議前娶參判鄭百昌之女生二男一女後娶縣監尹敬之之女生一女竝不育取宗姪魯得爲後文忠側室有一女 適宗室丹 城君光憲生三男三女順興側室有男女一人女適司果李揆生二男四女男曰國標武科通政郡守娶軍資判官李曄之女文忠公年七十八 戊子卒葬 反哭時順興先己窀穸孤孫震標纍然服斬抱狀而來泣謂余曰此不肖孤王大父事略王父易簀前數日病幾不能言顧不肖曰先人歿五十 七年墓碑 不剝此吾罪也嘗欲自草遺事乞銘於當世立言者終不能成文理而心與毫俱腐今己矣吾友金君兩世兄弟視是必能道吾先人之事我死 若往請之 吾將待此暝目於土中矣余不能辭泣而諾之所懼疾病昬耄不能揄掦光大無以慰孝子孝孫之心也於戯銘曰 燁燁順昌文武杰 遭世之歧受挫揠 歲次龍蛇殺機發 天池揚沸陸成血 列城無堅封豕突 公時何在在縲絏 勢迫門庭公迺出 用昧臨 晢良啚屈 重關失險河渭決 一死報 國公秉節 堂堂義氣貫白日 天佑厥子樹勳伐 表閭貤爵顯忠烈 孝哉曾孫思繼述 衣 冠所宅建 隆碣 名與穹壤無終畢 崇禎紀元戊辰之後三十五年壬寅 月 日立




해석

유명조선국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순창부원군 행 통정대부 의주 목사 의주진병마절제사 김공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 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順昌府院君行通政大夫義州牧使義州鎭兵馬節制使金公神道碑銘 幷序)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 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溥金尙憲) 지음.

가의대부 행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 동지성균관사 김좌명(嘉義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同知成均館事金佐明) 씀.

가의대부 한성부 우윤 겸 동지의금부사 이정영(嘉義大夫漢城府右尹兼同知義禁府事李正英) 전액(篆額)을 씀.


무릇 충신·열사가 나라를 섬김은 국난을 당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는데 있다. 하늘의 명(命) 또한 큰 공훈과 빛나는 업적으로서 그 자손을 반드시 창성하게 하니 이것은 마치 상하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보답하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은 이치는 크게 밝아 조그마한 착오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이로서 천리가 없다고 탄식하는 말을 군자(君子)는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년)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의 시호)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에 일본의 역추(逆酋) 수길(秀吉)이 대병(大兵)을 움직여 천조(天朝 명나라)를 범하려고 ‘길을 빌리자’고 외치면서 불일(不日)간에 조령(鳥嶺)에 다다르니 국사는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의주 목사 김공이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서 충주(忠州)에서 이들을 방어하다가 패하여 죽으니 나라에서는 장성(長城)을 잃은 것과 같았고 사민(士民)들은 이 비보를 듣고 애통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30년 후인 계해년(1623년)에는 간신이 종용하여 모후를 유폐(幽閉)하고 골육을 삼제(芟除 풀을 벤다, 즉 죽여 없애는 것을 의미함)하니 사람들은 이를 원망하고 귀신 또한 성내니 종사(宗社)가 자못 위태로웠다. 때에 공의 아들 문충공(文忠公) 유(瑬)가 충의지사를 거느리고 우리 주상(主上 인조)을 왕으로 추대하여 이륜(彛倫)을 다시 바로잡고 생민을 도탄에서 구하니 사직이 이로서 안정되었다. 이에 훈 1등으로 책봉되고 3대의 조상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증직(贈職)하게하니 공은 이로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순창부원군(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順昌府院君)을 추증받게 되었다. 이로 볼 때 하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보답한다는 말이 여기서 모두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삼가 공의 행적을 삼가 살펴보니 공은 순천이 본관이고, 이름은 여물(汝岉), 자(字)는 사수(士秀)이다. 7세조 승주(承霔)는 우리 공정대왕(恭定大王 태종)을 섬겨 공이 있어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분의 처음 이름은 을보(乙寶)였는데 가뭄을 당하여 기우(祈雨)의 명을 받고 비를 비니 바로 세찬 빗물이 쏟아졌다. 왕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지금의 이름을 내렸다. 그로부터 선공감 정(繕工監正) 원석(元石)에게로 전하여지니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 휘(諱)가 약균(若鈞)은 벼슬이 선공감 정이오, 할아버지 휘(諱) 수렴(粹濂)은 통정대부로서 정주(定州)목사를 지냈고 후에 병조판서를 증직 받으셨다. 아버지 휘(諱) 훈(壎)은 성현도(省峴道) 찰방(察訪)을 지냈고 후에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일찍이 덕을 쌓았으면서도 그 복을 자신에게 베풀지 않고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신천 강(康)씨 부사 의(顗)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무신년(1548년) 12월에 공을 낳으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글을 배우면서는 경전의 말을 실행하여 보려고 노력하였다. 공의 선세는 무변(武弁) 집안이어서 더욱 사마법(司馬法)에 통달하였고 힘이 좋아 바로 궁마술(弓馬術)을 익혀나갔다. 어머니 강씨 부인은 유가(儒家)의 훈육을 받아 예의범절이 절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공은 더욱 학문에 힘써 20세에는 진사에 합격하고 30세에는 대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신채(정신과 풍채)가 뛰어나 여러 사람들 위에 우뚝 섰으며 출입할 때에는 모두들 눈을 돌려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일세의 호걸(豪傑)들도 공보다 앞서는 사람이 없었고 공 또한 일세의 호걸로서는 자기보다 앞서는 자가 없다고 자부하였다.

호조·예조·병조등 3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어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고 오래지 않아 연이어 강원·경기 2도의 도사(都事)에 제배되었다가 병조로 돌아왔다. 상께서는 동원(東苑)에 납시어 무사를 열병(閱兵)할 때에 공의 활솜씨가 좋다는 말을 듣고는 공에게 활쏘기를 명하였으나 공은 눈병이 있음을 지적하고 사양하여 시사를 면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충청도 도사로 나갔다. 공의 인망이 매우 높았으나 한번도 전하의 가까운 자리는 공에게 주지 않으니 여론은 이를 원망하였다. 때에 사암(思庵) 상공(相公) 박순(朴淳)은 공에게 국사(國士)의 자질이 있음을 알고 마음으로 중히 여겼다. 마침 공의 임지 가까운 곳을 지나다가 공을 불러보고 빈주례(賓主禮)를 행하였다. 상공은 본래 사람을 잘 알아보는 분인데 좀처럼 사람들에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문하에 찾아드는 사람들도 일찍이 그를 허물없이 가까이 대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한번 마음을 허락한 바 있으면 그 사람을 마치 용이 하늘에 오른 것처럼 소중히 여겼으니 그날 상공께서 공을 대하는 것을 보고 누구나 깜짝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 방백(方伯)이 공을 업신여기고 자못 거만하였는데 그때에 병풍(屛風)뒤에 숨어서 공이 아랫사람들을 대하는 풍도를 보고는 크게 뉘우치고 사과를 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곧 안동(安東) 현감에 뽑혀 보임되었다.

안동은 전부터 영남에서 가장 중요한 고을이어서 공의 재목(材木)을 인정하여서라고 하였지만 실은 내쫓는 것이었다. 공은 그 점을 통감하고 호민(豪民)과 활리(猾吏)를 단속하기를 엄격히 하니 그들은 두려워서 벌벌 떨었으며 감히 전처럼 꾀를 써서 버티지를 못하였다. 다시 병조로 들어와 옥당록(玉堂錄 홍문록)에 참록되었으며, 헌납에 제배되었고 또 어사(御史)로 호남을 순무(巡撫)하였다. 마침 순천(順天) 부사 자리가 비었으나 어려운 자리여서 마땅한 사람을 얻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상께서 지금 문무를 갖춘 자가 누구냐고 물으시니 모두들 김(金)공을 으뜸으로 추천하였다. 또 묻기를 “이 사람에게 순천부사를 제수하였으면 하는데 노모(老母)가 있다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하니 전조(이조)에서는 품계가 낮아 안된다고 아뢰었다. 이는 여러 대신들의 의견이 공을 본조의 낭관으로 그대로 쓰고 싶어서 그랬는데 상께서는 특별히 품계를 올려주시어 임용하시었으니 이는 남다른 예우였다.

을유년(1585년)에 내간(內艱)을 당하였고 복제(服制)를 마치자 담양(潭陽)부사에 제수되고 이어 대신들의 천거로 의주(義州) 목사가 되었다. 전임자들은 음식과 성악을 크게 베풀어 빈객을 즐겁게 함으로써 명예를 얻는데 급급하고 변비(邊備)는 도외시 하였었다. 공은 구폐를 모두 고쳐 훤하게 모습을 고쳐놓았다. 그러나 일이 바르게 되자 비방이 일어 1년 만에 파면되어 돌아왔다. 임진년(1592년) 봄에는 역인(驛人)이 상국에 왕래하면서 술에 취하여 실언을 하여 금오(金吾 의금부)에 구속되어 취조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공에게까지도 이 사건에 연류 시켰다. 당시 공과 사이에 좋지 못한 자가 있어 이 기회를 이용 공을 중상모략하니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다. 마침 그때 변우가 몰아치니 상께서 하교하시기를 “이럴 때는 김여물이 가히 애석하니 잘못을 용서하고 공을 세우게 하라.”하였다. 체찰사 유성룡(柳成龍)과 신립(申砬)이 서로 자기의 보좌로 쓸 것을 청하였는데 상께서 명하여 신립과 함께 있게 하였다.

공은 앞서 옥중에 있을 때 감옥에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비변사의 생각은 적이 상륙하기를 기다렸다가 친다 하지만 이는 병법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적이 상륙하면 반드시 당하지 못할 것이다.”하였고 충주에 도착하자 신립에게 “적의 사기가 매우 날카로워 교봉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조령(새재)을 고수하여야 할 것이오.”라고 건의하였으나 신립이 듣지 않았다. 적이 이미 재를 넘어 왔을 때 또 “먼저 고지를 근거로 삼고 추격하다가 불리하면 서울에 들어가 서울을 지켜야 할 것이오.”라고 건의하였는데 이 또한 듣지 않고 배수(背水)의 진을 쳤다.

공은 이 전투에서 반드시 패할 것을 미리 알고 아들에게 서신을 띄어 말하기를 “3도의 근왕사(勤王使)는 한 사람도 오는 자가 없고 우리들은 팔을 걷어 부치고 온 힘을 다하지만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못하구나! 남아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국치(國恥)도 씻지 못하고 큰 뜻도 이루지 못하나 이것이 한이 됨이로다.”하였고 또 집안사람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행재소로 갈 것이며 도망갈 계책은 꾸미지 말라.”고 하였다. 적은 60만이나 되는 대병력이라 외치면서 마치 노도와 같은 기세로서 밀고 들어와 칼로 치고 포로 쏘고 별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치니 사람이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신립이 창황(蒼黃)중에 장계를 올리려하여 공에게 초할 것을 부탁하고 자신은 갑주를 두르고 허리에는 살통을 메고 팔에다 활을 걸고 의연히 서서 적진을 바라보는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공은 먹을 갈아 쓰기를 마치고 붓을 던졌는데 한 글자도 틀림이 없었고 그 정채(精彩)한 모습은 평일보다 갑절이나 더하니 장하(帳下)에서 보는 사람마다 우러러보고 칭찬해마지 않았다. 우리 군대는 수효도 적고 각처에서 불려온 사람들이라 마음도 굳지 못하여 전투가 시작되자 과연 모두 다 분궤(奔潰)하고 말았다. 공은 군중에 있었으나 하나의 사오(士伍)에 불과하였고 또 형세가 급박하여 군령이 행해질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신립이 공의 자를 부르면서 “자네도 살기를 원하는가?”하고 물으니 공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내 어찌 죽음을 아끼랴.”하고 함께 탄금대(彈琴臺) 아래에 이르러 직접 적 수십 명을 죽이고 함께 물로 뛰어드니 바로 임진년(1592년) 4월 28일이오, 이때 공의 나이는 45세였다.

이듬해 계사년(1593년)에 의관(衣冠)을 거두어 안산동(安山洞) 장리(長里)의 간좌(艮坐) 곤향(坤向)의 언덕에 새로운 자리를 잡아 장사를 지냈다. 조정에서는 정려(旌閭)를 세워주었으니 『삼강록(三綱錄)』과 『충신전(忠臣傳)』속에 그 일이 실려 있다. 처음 상께서 묘당에 대해서 서남(西南)쪽 변방의 군현에 완급이 생기면 보루가 될 만한 사람을 천거하라 하여 묘당에서는 송상현(宋尙賢)과 공을 천거하여 왕지(王旨)에 응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난리가 나자 송공은 동래에서 죽고 공은 여기에서 죽었으니 사람들이 비로소 조정의 사람 가림이 제대로 맞아 국가에 크게 빛이 되었다고들 하였다. 그러나 일이 없을 때에는 밖으로 밀어내고 일이 급하면 조금 시험해 보는 정도에서 그치고 공이 제시한 계획은 한 번도 행하지 않아 마침내 공의 뜻은 쓰이지 못하고 또한 그 공을 거둘 수 없게 하였으니 이러고도 난을 평정 하는 데에 무슨 비책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공은 비록 죽었으나 모든 사람들이 그 충열을 높이 우러러 말로 전하고 글로 기록하여 영구히 표현하고 있으니 먼저의 어진 이를 질투하고 능한 이를 해친 무리들이 그 뼈도 썩기 전에 그 이름부터 이미 묻혀 버렸음과 비교할 때 그 상거가 어떠한가? 공은 위인 됨은 뜻이 있고 기개가 있어 의기를 좋아하여 항상 천만 사람을 상대하려는 호기를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아버지처럼 섬겨 혹 꾸지람을 들으면 종일토록 문밖에 엎드려 명이 없으면 물러나지 않았으며 녹봉(祿俸)을 받으면 몽땅 어머니에게 바치고 한푼도 사사로이 하지 아니하였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고 약속을 중히 여기어 사생과 비천으로 간격을 두지 아니하였다. 친구 중에 자녀를 많이 두고 내외가 구몰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친구의 아들 중 가장 유약한 자를 데려다 자식처럼 길렀는데 문충공과 함께 자라니 남들은 그가 남의 아들인 줄을 몰랐다. 함께 상종한 사람은 모두 으뜸가는 선비들이었으나 의주부사 서익(徐益)과 구성현감 임식(林植)이 가장 친하였다. 2사람 또한 어머니가 있어 매양 생신을 당하면 공이 받들기를 마치 자기 어머니 받들 듯 하였고 2사람 또한 그러하였다. 공의 밝은 덕과 아름다운 행적은 이루다 기록할 수 없기에 공의 행적중 주요한 것만 골라 기록하니 대강 이와 같고 여타의 세세한 행적은 생략한다.

공의 사부시문(詞賦詩文)은 다 훌륭하여 남과 수작(酬酌)한 시구나 편지도 범상한 필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름 얻기를 싫어하였기에 남들이 알지를 못하였다. 부인 박(朴)씨는 함양(咸陽)의 이름난 가문으로 현감 강수(崗壽)의 따님이다. 밝고 맑으며, 효의(孝義)하여 여자의 모범으로 전할 바가 많았다. 공보다 1년 후인 계사년(1593년) 5월에 강화(江華)에서 돌아가시니 그해 겨울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그 이름은 유(瑬)다. 두 번이나 정사(靖社) 영국(寧國)의 원훈(元勳)을 세웠고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대제학을 겸하였고 세 번씩이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오 인조(仁祖)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그는 진원(晋原)부원군 유근(柳根)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 이름은 경징(慶徵)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정사공신(靖社功臣)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으며 한성부 판윤(判尹)을 역임하였다. 그가 부사 박효성(朴孝誠)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를 낳으니 그 이름은 진표(震標)이다. 문과에 장원(壯元)하여 일찍이 참의를 지냈고 참판 정백창(鄭百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으며, 또 현감 윤경(尹敬)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어 1녀를 두었으나 모두 기르지 못하여 종질(宗姪) 노득(魯得)으로 후사를 잇게 하였다. 문충은 측실에서 1녀를 두었던바, 종실 단성군(丹城君) 광헌(光憲)에게 출가하여 3남 3녀를 출생하였고, 순흥군은 측실에서 남녀 1인씩을 두었던 바, 딸은 사과(司果) 이규(李揆)에게 시집가서 2남 4녀를 두었다. 아들 국표(國標)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군수(郡守)공은 군자판관(軍資判官) 이엽(李曄)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문충공은 나이 78세인 무자년(1648년)에 돌아가셨는데 장사지내고 반곡(反哭)할 때 순흥군은 이미 하세(下世)하였다. 고손(孤孫) 진표가 너절한 상복차림으로 가장(家狀)을 끼고 나에게 찾아와 울면서 하는 말이 “이것은 불초고의 증조부의 사략(事略)입니다. 조부게서 돌아가시기 몇 일전 병으로 말을 거의 못하시는 몸으로 나를 돌아보고 하는 말이 ‘선인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57년이 되었으나 묘비를 세우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의 큰 죄이다. 일찍이 유사(遺事)를 스스로 기초하여 당세의 입언자(立言者)에게 명(銘)을 빌려고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마음과 붓이 다 썩어버렸으니 이제는 그만이다. 나의 친구 김군 종형제들은 이것을 보면 반드시 내 선인의 일을 기술하여 줄 것이다. 내가 죽으면 네가 가서 청하여 보아라. 나는 앞으로 땅속에 들어가서도 이것을 보고서야 눈을 감으련다.’하였습니다.”하였다. 나는 사양할 수가 없어 울면서 승낙하였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병들고 혼모하여 공의 행적을 능히 유양하여 광대케 할 수가 없으니 효자 효손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점이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엽엽한 순창(順昌)은 문무의 걸출로 세상의 기로에서 좌절당하였네,

용사(龍蛇 임진 계사년)에 살기가 발하니 하늘은 뒤끓고 땅은 피바다가 되었도다.

늘어선 성들은 견고하지 못하고 돼지떼는 돌진해 오는데 공은 어디에 있었느냐? 옥중에 있었다네.

위기가 문정(門庭)에 다달았을 때 공은 풀렸으나 몽매한 자가 어진 이를 다스리니 양도는 굴할 밖에,

중관은 실수하고 하수 위수 모두 터지니, 일사보국(一死報國)으로 공은 고절을 세웠도다.

당당한 의기는 백일을 꿰뚫었으니, 하늘은 그 아들을 도와 훈벌(勳伐)을 세웠네,

정려 세우고 관작 더하여 충렬을 들어냈고, 효성스런 증손은 계술할 길 모색하네.

의관을 정제한 곳에 높은 비 세우니, 이름은 천기가 다할 때까지 끝없이 빛나리라.


숭정기원(崇禎紀元) 무진(戊辰)년 후 35년 임인년(1662년) 월 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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